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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커스]산사에서 열린 프랑스 중세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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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커스]산사에서 열린 프랑스 중세 음악회

입력
2003.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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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적막하지 않았다. 가끔 기차가 지나가고 매미가 울었다. 밤이 이슥할수록 또렷해지는 불빛을 따라 부나방들이 연주장으로 몰려들었다. 카운터 테너는 날벌레를 팔로 쫓으며 노래를 했다. 청중들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22일 저녁, 전북 정읍시 정우면 산불리 정토사. 신태인역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이 아늑한 700년 고찰에서 유럽 중세음악을 연주하는 프랑스 원전 연주단의 음악회가 열렸다. 초대된 연주단은 1965년 결성된 파리 아르스 앙티카 앙상블. 카운터 테너와 리코더 연주자, 기타·류트 연주자 세사람으로 구성되어 파리와 아비뇽 등 프랑스의 음악축제는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 캐나다 중남미 아시아에서 순회공연을 계속해왔다. 우리나라에는 1980년 처음 온 후 올해가 다섯번째 방한. 춤곡과 종교음악으로 구성된 실내악 레퍼토리의 특성상 음악당 또는 성당에서 연주회를 가져왔다. 절에서 연주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산 중턱에 자리잡은 절에는 오후 다섯시부터 사람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들을 먼저 반긴 것은 소독차. 모기가 극성을 부릴 것을 대비해 정읍시청에서 보내온 것이다. 하얀 연기가 절터를 온통 휘감고 나간 후 사람들이 찾아오는 속도가 늘었다. 무엇보다 종교인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92살의 고령인 법천스님도 보였다. 고창에서 왔다는 수녀님들과 원불교 정녀분들도 있었다. 어느 수녀님은 "스님이나 저희나 다 같은 수행자"라며 "산사에서 좋은 음악을 한다니 듣고 싶어서 찾았다"고 말했다. 파리아르스앙티카앙상블은 다음날 전주 솔내성당에서도 연주를 하지만 고창에서는 이 곳이 더 가깝다. 모여든 이들에게 명원문화재단 정읍지회서 차와 쑥설기를 대접했다. 떡접시 대신 쓴 감잎 때문에 기분은 한껏 고양된다.

연주회는 약속된 오후 7시30분에 정확히 시작됐다. 법당(약사전)이 작다보니 연주자들은 법당안에 앉고 청중들은 뜰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정토사 삽살개 문수와 청산이는 줄에 묶였다.

음악회를 주최한 원공스님이 "이 깊은 산골까지 누가 오랴 싶어서" 의자를 100개만 준비했는데 모여든 청중은 어림잡아 봐도 300명에 가깝다. 사람들은 의자 뒤에 서거나 평상과 돌에 앉고 감나무에 기댔다.

정애자 전주프랑스문화원장(51·전북대 의대 교수)의 간단한 연주자 소개가 끝나자 음악이 시작됐다. "아이들을 조용히 시켜주시고, 휴대전화는 물론 다 끄셨겠지요."

음악회는 카운터 테너 조젭 사쥬(73)의 노래로 시작됐다. 생루이시대(12세기) 작곡된 '꽁트르 땅끄 봐 프리메'(Contre tans que voit frimer). 맑은 소리가 소나무숲을 타고 하늘에 이르는듯했다. 쑥향기와 솔잎냄새가 건듯 바람에 실려왔다.

연주곡은 생루이 시대 음악이 다섯 곡, 14∼15세기 프랑스 음악이 6곡, 16세기 스페인음악이 8곡으로 모두 19곡. 한결같이 2분내지 3분가량의 짧은 음악인데 카운터 테너의 노래와 연주곡을 번갈아 연주했다. 원래는 종교음악을 많이 연주한다지만 절에서 열리는 것을 감안해 가톨릭성가는 '주여, 아시나이까'(Seingneurs sachiez) 한 곡만 넣었다.

음악회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아이들도 휴대전화도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호남선 열차들. 헬리콥터 소리를 방불케 하는 화물열차를 비롯해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가 연주회 한 시간동안 이 곳을 지나갔다. 첫번째 기차소리가 시작될 때 미간을 찌푸리던 연주자들은 기차소리가 올라오는 야외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표정이 고와졌다.

14∼15세기 프랑스 음악이 시작되자 잠에서 깨어난 매미들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동네에서는 된장국 냄새가 올라왔다. 스페인 음악인 '두 개의 연주곡'(Deux recercadas)을 연주할 때는 청산인지, 문수인지가 짖었다. 소독약에도 불구하고 기승인 모기를 쫓는다고 여고생들이 팸플릿을 팔락이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마지막의 세곡. 각기 류트와 리코더, 카운터 테너의 독주곡인 이 절정에서 매미조차 울지 않았다. 기차도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음악에 흠뻑 빠져들었다. 1시간이 꿈결처럼 지나갔다.

우레와 같은 박수속에 연주자들은 앙코르를 하지 않았다. 좁은 약사전에 조명을 붙이다보니 너무 더웠던 모양이다. 앙코르용 악보를 호텔에 두고 왔다고 했다. 그러나 먼 길을 달려온 청중을 생각하면 좀 야박하다 싶었다.

음악회를 마친 세 사람의 반응은 "멋졌다" "대단했다"("formidable" "extraordinaire"). 조셉 사쥬는 "절에서 음악회를 한 것은 처음인데 야외라 소리가 제대로 날까 걱정했는데 음향기술자들이 무척이나 잘 맞춰주었다. 이들에게 감사한다"며 "장엄한 성당과 달리 절에서 연주가 더 자연스럽고 대중적이고 집중이 잘됐다"고 말했다.

음악회가 끝나자 가장 시끌벅적하게 연주자들에게 달려간 이들은 신태인읍 왕신여고 학생들.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었다. 이들은 국어교사인 김금자씨가 자동차로 실어날라온 제자들. 김씨는 "나야 공연보러 서울이나 전주로도 나가지만 시골에 있는 학생들은 공연을 접할 기회가 없어서 안타깝던 차에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겨 학생들을 데려왔다"고 말했다.

귀명창이 많은 전북답게 연주회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월간 오디오 객원기자를 지낸 고윤석(29·정읍시)씨는 "카운터 테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인) 안드레아스 숄보다 훨씬 뛰어나다. 류트는 앞부분에서 두번이나 틀렸다"고 지적하자 이성면(48·정읍 배영고 음악교사)씨는 "카운터 테너도 마지막에 목소리가 한번 뒤집어졌어"라면서 "그런게 바로 생음악의 진수"라고 받았다. 정읍서 나무농장을 하며 연주장 안팎에 화분을 전시공양한 김훈성(54)씨는 "그래도 음반보다 음악회 음질이 훨씬 낫던데"라며 대만족을 표시했다.

정토사 신도로 정읍에서 돼지를 키우는 남편 노춘섭(36)씨와 함께 여섯살, 세살 짜리 두 딸을 데리고 온 장서라(33)씨는 "아가씨 때는 서울 살며 음악회도 많이 다녔는데 시골에는 이런 기회가 정말 흔치 않다"며 "앞으로도 이런 음악회가 자주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산사 음악회를 제안한 이는 전북대 불문과 김현기(50)교수. 가톨릭신자인 그는 "프랑스의 음악도 우리가 들어야 하지만 프랑스 음악인들도 우리 문화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산사 음악회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류성엽 정읍시장은 "앞으로 정읍의 문화수준을 높여줄 이 같은 행사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연주자들에게는 정토사 주지 원공스님이 죽비를 선물했다. 겨자색 한지로 싸고, 가운데를 주황색 한지로 질끈 묶은 뒤 사이에 산사 조경 때 자른 철쭉 가지를 한 개 꽂은 죽비 포장은 원공 스님의 작품. 리코더를 연주한 마리 노엘(44·낭트국립음악원 교수)은 "포장이 너무 아름다워 프랑스까지 이대로 풀지 않고 가져가겠다"고 했다. 분명 이들에게도 한국문화의 격조를 느끼게 한 하루였으리라.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 정토사 주지 원공스님

음악회는 연주만이 볼거리가 아니었다. 약사전 양쪽으로 놓은 옹지 자배기에 꽂힌 개망초꽃, 그 앞의 철쭉화분 같은 장식은 물론이고 시작전 다과대접, 그 후의 리셉션까지 모두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문화의 맛을 총체적으로 실감하게 했다. 이날 행사를 위해 서울 인제 전주 정읍,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원공(56·사진)스님의 지인들이 몰려들어 자원봉사를 맡았다.

원래 산사 음악회는 금산사 법당 내부에서 열릴 계획이었다. 전주프랑스문화원장의 부탁으로 금산사 스님들과 장소섭외를 주선하던 원공 스님은 금산사 스님들이 사찰 음악회를 마뜩찮아 하자 정토사로 음악회를 가져왔다.

"사람들이 시대 상황 때문에 많이 지쳐있고 경제가 어려워서 마음이 각박해졌다. 음악을 통해서 어려운 농촌 사람들이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음악회를 열게 됐다"는 원공 스님은 "진실하고 맑은 음악은 누구의 마음에나 와닿는 것이고 수행도량과도 잘 어울린다"고 풀이했다.

주위에서는 "멋진 음악공양"이라고 하지만 스님 자신은 "진짜 음악은 기교를 떠나서 무색 무취이며 텅빈 경지이다. 그 경지에 이르면 음악이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님은 늘 음악을 듣는 상태이다. 음악을 (따로) 올리는 것은 중생의 입장에서 드리는 것일 뿐"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이런 음악회를 계기로 사람들이 절을 가까이 하고 진정한 음악인 불법(佛法)에 눈뜨길 바란다"고 했다.

정토사는 "정토사에 세번은 가야 극락에 간다"는 전설이 있는 고찰이나 버려지다시피 한 것을 원공스님이 6년전부터 가꾸다가 지난해부터 주지를 맡아 공양주도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

원공 스님은 1968년 송광사에서 출가했으며 백양사 주지를 지냈다. 현재 선운사 교육원장 겸 포교원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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