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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 대통령의 사람들]<17>권력의 균열 ⑭·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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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 대통령의 사람들]<17>권력의 균열 ⑭·끝

입력
2003.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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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영(安相英) 부산시장이 김정길(金正吉) 수석은 부산서 당선될 수 있다고 하더라."부산시민공원 개원식(1999년 10월 16일)에 다녀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다음날 아침 김중권(金重權) 비서실장, 김 수석과 차를 한 잔 하면서 건넨 말이다. 김 수석은 "부산에서 출마하라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김 수석은 DJ와의 티 타임 후 안 시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께 쓸데없는 소리 했지"라고 힐난조로 물었다.

김 수석은 다음해 총선(2000년 4월 13일)에서 경기 분당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국민회의 당직자들도 "여론조사를 해보니까 부산에서는 더블 스코어로 밀린다"면서 수도권 출마를 권했다. 그러나 DJ가 전국정당 구축,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명분에 전력을 기울이는 마당에 김 수석은 분당 출마를 고집할 수 없었다. 김중권 비서실장도 고민하는 김 수석에게 "나도 서울서 나가면 당선 가능성이 더 높지만 대통령을 모시는 우리가 우회하면 되겠느냐. 영남에서 살아 돌아오자"고 설득했다.

김 수석은 교체(11월 23일) 1주일 전쯤 DJ에게 "분당은 이기고 부산은 어려운 것으로 나오지만 낙선을 각오하고 부산에서 출마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DJ는 "김 수석은 남다르다. 정말 고맙다. 잘못 되더라도 내 옆에서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격려했다.

김중권 실장에 대한 DJ의 격려는 더욱 두터웠다. DJ는 김 실장이 물러나기 직전 19일 조찬, 21일 오찬 등 두 차례나 둘만의 식사를 할 정도로 우의(友誼)를 보여주었다. 당시에는 옷 사건으로 정국이 요동치고 청와대 비서실의 개편론이 제기되는 상황이기도 했다. DJ는 김 실장을 극진히 예우함으로써 문책 경질이 아닌 출마를 위한 용퇴로 보이게 하려고 애를 썼다.

김중권 민주당 고문의 회고. "9월초쯤 대통령이 '동서화합을 위해 영남에서도 여당 의원들이 나와야 하는데…'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만섭(李萬燮) 총재권한 대행을 만나 '대구에서 나와 이 대행, 이수성(李壽成) 전 총리가 함께 출마해 분위기를 바꿔보자'고 상의한 적이 있다. 이 대행이 '그런 소리 말라'며 난색을 표해 대구 출마는 없던 일이 됐다. 대통령은 나를 내보면서 경북 봉화·울진에서 당연히 당선될 것으로 믿었다. 여론 조사도 좋았다. 지금 밝힐 수는 없지만, 대통령은 물러나기 전 당선 이후의 할 일에 대해 깊은 얘기와 격려를 해주었다."

DJ는 이처럼 국민회의의 호남당 이미지 탈색, 소수정권의 한계 극복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수도권 출마 시 당선이 유력했던 김중권, 김정길 등 명망가들을 영남권에 출마시키기로 했을 뿐 아니라 보다 큰 차원에서 정계재편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계재편은 크게 두 방향으로 모색됐는데 하나는 자민련과의 합당이고 다른 하나는 신당 창당이었다. 합당과 신당 창당은 별도로 진행됐지만, 궁극적인 종착점은 전국정당의 탄생이었다.

신당 추진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자민련과의 합당 문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자민련 의원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DJP 사이에 합당 약속은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김중권 고문은 "내막을 모르고 하는 얘기들"이라고 반박했다.

김 고문은 지난 회(18일자 17면)에 소개된 '합당 합의'에 대해 보다 자세한 증언을 했다. "워커힐 회동(7월 18일) 후 대통령은 '김종필(金鍾泌) 총리와 합당하기로 합의했다. 당과 긴밀히 의논해 합당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언론의 합당 보도로 난리가 나는 바람에 21일 대통령, 김 총리, 박태준(朴泰俊) 자민련 총재가 회동해 내각제 유보, 합당 불가 등을 발표하게 됐다. 청와대는 이후에는 자민련 내부의 논의 결과를 지켜볼 뿐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

JP가 합의를 해놓고 자민련 내부의 반발을 추스르지 못해 포기했다는 얘기다. 진실은 무엇일까. DJ나 JP는 이 대목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다만 21일의 DJT 회동에서 합당 불가가 발표됐는데도 합당론이 계속 제기됐다는 점에서 DJP 사이에 뭔가 내밀한 논의가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더욱이 JP는 10월 1일 케이블 방송(Q채널)과의 대담에서 "당(자민련)에서 조금 섭섭하더라도 국가적 견지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것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가타부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언급, 합당론에 불을 지른다. JP는 '국가적 차원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냐'는 질문에 "개인 차원을 떠나, 당 차원에서 생각하고, 당은 또 국가를 위해 존재하니까, 당을 떠나 나라를 위한 방향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술 더 떠 DJ는 1주일 후(10월 7일) 인천방송과의 회견에서 "연말까지 합당 문제를 매듭짓고 내년 초에 거대신당을 만들어 국민 신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마치 물밑에서 합당 논의가 치밀하게 진전되고 있는듯한 뉘앙스였다.

자민련은 들끓기 시작했다. TK출신 의원들은 '합당은 곧 낙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탈당 불사를 공언했고 충청권 의원들도 반발했다. 한영수(韓英洙), 이태섭(李台燮) 의원 등 수도권 인사들만 환영할 뿐이었다. 혼돈은 12월까지 계속됐다. 더 이상 합당 문제가 해를 넘기기 어려운 국면이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DJ와 JP가 만난다. DJ는 12월 6일 남미 순방(7일∼21일)을 떠나는 JP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총리 공관을 방문했다. 대통령이 아랫사람인 총리를 찾아갔다는 것은 합당을 염두에 둔 예우였다. 이 회동 후 합당 밀약설은 더욱 퍼졌고 JP 귀국 후 매듭지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나 JP는 7일 출국에 앞서 자민련 당직자들과의 오찬에서 "6일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합당의 '?'자도 꺼낸 적이 없다"고 말했고 21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합당 반대 의사를 밝혔다. JP는 귀로에 LA를 방문했을 때 당내의 합당 반대 기류를 전하기 위해 날라온 김현욱(金顯煜) 사무총장과 이양희(李良熙) 대변인에게도 "당의 뜻이 그렇다면 그만 두겠다"고 말했다.

귀국 후 DJ와 JP는 22일 국민회의·자민련 송년 만찬에 앞서 회동을 갖고 마지막 담판을 벌인다. 그 동안의 온갖 우여곡절과는 달리 결론은 의외로 싱겁게 났다. DJ는 "총리께서 미국에서 합당이 어렵다는 의사를 밝히셨는데 그게 맞습니까"라고 물었고 JP는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DJ는 "생각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합시다"라고 말했다. 합당 불가가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자, 사실상 결별로 가는 길이었다. 이 과정을 보면, DJP 사이의 합당 논의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가 의문스럽다.

김현욱 전 의원의 증언. "워커힐 회동에서 합의가 있었던 것 같다. 박태준 총재도 '대통령으로부터 JP와 합당 합의를 했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JP는 마음을 완전히 굳힌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 앞에서 'NO'라고 얘기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합당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일단 합의했다고 본다. 이후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또 DJ와 국민회의가 구체적으로 조건을 제시하지 않아 마음을 접었다고 본다. 3당 합당후 팽(烹) 당한 경험도 주저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11월말부터 청와대 정무수석을 맡았던 남궁진(南宮鎭) 전 의원의 얘기. "자민련과의 합당을 시도했고 원했다. 합당 논의가 좀더 진전됐으면 DJ는 총재직을 줄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JP가 포기하는 바람에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단계에까지 못 갔다."

김현욱 전 총장, 이양희 의원의 증언. "만약 총재직을 제의했다면 협상은 진척됐을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와 국민회의가 언론 플레이만 했다. 압박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자민련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했다. 정말 합당하고 싶었다면, DJ가 총재직이나 공천권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했어야 했다."

사후 분석과 평가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으로 달랐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DJ와 JP,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서로를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불신은 연합공천도 어렵게 만들었고 결국 결별의 길로 가게 했으며 다음 해 총선에서 자민련의 몰락을, 신당인 민주당의 다수의석 확보 실패를 초래했다. DJP 정권의 전제 조건인 신뢰가 깨지면서 양쪽 모두 깊은 상처를 입게 됐고, 이는 권력의 균열을 가져온 결정적 원인이 됐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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