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국가들이 정치통합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딛었다. 유럽연합(EU) 정상들은 최근 그리스 포르토카라스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유럽미래회의(CFE)가 마련한 헌법 초안을 채택했다. 이 헌법안은 내용상 완전한 유럽 통합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EU의 50여년 통합역사에 중대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헌법 초안 내용
EU(또는 새로운 연합)의 법적 지위가 향상됐다. EU는 구속력을 갖는 법 인격체로 규정됐으며 이에 따라 독자적인 조약을 체결하거나 국제기구에도 가입할 수 있다.
EU의 헌법과 법률은 회원국의 법률에 우선하며 특히 주요 외교정책에 있어서 각국은 거부권이 금지된 채 적극적으로 EU의 정책에 따라야 한다.
EU는 강력한 리더십을 위해 각국 정상들이 모인 이사회에서 임기 2년 6개월(중임 가능)의 상임 대통령을 선출, 국제사회에서 EU를 대표하도록 했다.
현재는 회원국들이 6개월마다 돌아가며 의장직을 맡는 순번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사회에서 선출하는 외무장관직도 신설돼 EU의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한다.
또 각국에서 직선제로 선출되는 의원들로 구성되는 유럽 의회의 권한이 두배 이상 확대된다. 유럽 의회는 또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할 집행위원회의 의장을 선출해 유럽 대통령과 외무장관을 견제한다. 고용, 인권 등의 분야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EU 권리 헌장'의 채택, EU 탈퇴조항 신설 등도 특징이다.
의미
당초 CFE가 구상했던 강한 EU 청사진이 논의 과정에서 각국의 반발에 밀려 대폭 후퇴한 양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 초안 마련이 유럽 통합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다.
초안은 처음으로 EU와 회원국 사이의 권력 분할 문제를 명시했다. EU에게 더 많은 권한과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 동안 EU는 단일 유럽의 대표라기보다 여러 회원국들이 모여 문제를 함께 논의하는 합의체에 불과했다.
통합 움직임은 주로 경제 부문에 국한됐으며 각종 국제 현안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힘들었던 것이 현실이다.
초안은 또 강력한 권한을 갖는 대통령·외무장관직의 신설, 의회 권한 강화 및 대통령 견제 역할 등 민주주의 국가 운영 시스템을 확정함으로써 EU의 궁극적인 목표가 단일 국가라는 점을 보여줬다. 냉전 종식 이후 유일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보다 강력하게 뭉쳐야 한다는 절박감이 EU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EU가 내년 5월 동구권 10개국을 새 식구로 받아들이며 몸집 불리기에 적극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전망과 과제
EU는 10월 중 정부간회의(IGC)를 열어 연말까지는 EU 헌법을 확정할 계획이다. 확정된 헌법은 10개 예비 회원국을 포함한 25개 회원국별로 8월부터 의회 표결이나 국민투표를 거쳐 비준을 받게 된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마무리되면 EU 헌법은 2006년 발효될 예정이지만 비준이 늦어지면 그만큼 일정도 차질을 빚게된다.
연말까지로 예정된 헌법 확정 과정에서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세부적인 논란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초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도 각국의 견해차가 심해 연합 형태, 거부권 등 민감한 부분에 있어서 구체적인 입장을 마련하지 못하고 논의를 유보시키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간 심도 있게 논의되던 새로운 연합의 명칭도 영국 등의 반발로 초안에서 제외됐다.
특히 강력한 EU의 필수 조건인 자체 군사력에 있어서는 "회원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유도하고 향후 공동방위를 추구한다"는 정도만 제시했을 뿐이다.
유럽 소국들은 EU 대통령의 선출이 결국 힘 있는 자들만의 잔치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하는 등 이번 초안에 대해 적지 않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논란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유럽 통합의 물줄기는 이번 헌법 마련을 계기로 한층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 유럽미래회의란
유럽연합(EU)의 구조개혁과 통합 유럽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회의. 2000년 12월 프랑스 니스 EU 정상회의에서 유럽연합의 개혁 등에 관한 기본 방향을 정했음에도 이후 구체적인 합의 도출이 지지부진하자 만들어졌다. 2002년 2월 28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회원국 15개국과 중·동부 유럽의 가입 희망국 13개국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첫 회의를 개최한 이래 16개월의 작업끝에 13일 유럽헌법 초안을 만들어냈다. 의장은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전 프랑스대통령. 정식 명칭은 '유럽의 미래에 관한 회의'이며 유럽 헌정회의로 부르기도 한다.
● EU 초대대통령 누가
대통령제를 신설한 유럽연합(EU) 헌법 초안이 채택되자 벌써부터 누가 EU의 초대 대통령이 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 대통령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인사들은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스페인 총리, 아티사아리 전 핀란드 총리, 포그 라스무센 덴마크 총리 등이다.
가장 앞서고 있는 후보는 블레어 총리. 이라크전을 승리로 이끈 그는 미국과 EU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평가받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드러내 놓고 그를 지지하고 있다. 헌법 초안을 만드는데 공헌한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도 유력한 후보이다. 그는 유럽미래회의(CFE)의 의장으로서 EU 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시라크 대통령은 블레어 총리와는 반대의 입장에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즉 미국에 맞서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국제 무대에서는 무명에 속하는 아스나르 총리는 미국 및 EU와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것이 최대 강점이다.
/김철훈 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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