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휴대폰을 여니 오늘은 헤어진 여자친구의 생일이다. 홀로 그녀의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집을 나선 주인공은 헤드폰을 끼고 힐리스(바퀴 달린 신발)를 신은 채 거리와 백화점을 활보한다. 그리고 조촐하게 차린 생일상 앞에서 떠나간 그녀 대신 허공을 향해 포도주 잔을 권한다.신인 가수 세븐의 뮤직 비디오 '와줘'의 줄거리다. 세븐의 모습은 혼자만의 세계에 완벽하게 빠져든 젊은 세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은? 전통적으로 집단주의 경향이 강한 한국에서도 인간관계의 변화 조짐은 곳곳에서 보인다.
요즘 10·20대 사이에 뜨고 있는 놀이는 바로 '혼자 놀기'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혼자 놀기'는 방송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강한 전파력을 띠고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친구가 무슨 소용입니까?" KBS 2TV '개그콘서트'의 봉숭아학당 코너 시간이 되면,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개그맨 이정수가 등장한다. 그가 내세운 웃음의 코드는 '혼자 놀기'. 죽은 듯 가만히 누워 있는 시체 놀이에서 부침개 놀이, 건전지 놀이, 못 먹는 감 찔러 보기 놀이 등 기상천외한 원맨쇼를 선보인다.
'혼자 놀기' 현상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독특한 사이버 문화를 구축, 신조어를 양산하고 있는 '디씨인사인드
(www.dcinside.com)' 같은 인터넷 사이트다. 일종의 디지털 사진동호회 성격의 이 사이트에 올 초 엽기적인 사진 한 장이 게시돼 네티즌의 폭발적 관심을 끌었다. 조회수 8만 건을 넘은 이 사진은 한 네티즌이 과자류 제품인 '죠리퐁' 알갱이를 10개씩 분류해 찍은 것. '죠리퐁' 내용물을 일일이 세 본 것이다. 곧 이어 캡슐약 '콘택 600'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의 개수를 직접 세어 봤다는 네티즌까지 나타났다. 물론 이 과정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뒤 사이트에 올려 사람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이후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 장판무늬 개수 세기, 카페트의 털 세기, 밥알 개수 세기 같은 엽기적 '혼자 놀기' 비법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왜 그런 소모적 일을 하는 걸까. '콘택 600' 사진을 게재한 홍정석(30·프리랜서 컴퓨터 강사)씨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사이버 세계가 아니더라도 '혼자 놀기'에 익숙한 나홀로족(族)은 어디에나 있다. 이들은 휴대폰으로 단순히 전화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을 타면 끊임없이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게임을 하고, 음악을 듣고, 동영상을 보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회사원 최모(29·여)씨는 매일 밤 3시간씩 케이블채널 서핑을 한다. 동아TV에서 시트콤 '프렌즈'를 보고, 캐치온에서 프라임 타임 영화를 확인한 뒤 음악채널로 돌려 노래 한 곡을 듣고 하는 식이다. "채널 수가 늘어나면서 그야말로 자기가 놀고 싶은 대로 채널을 돌리면서 볼 수 있게 됐다"고 최씨는 말한다. 정보통신(IT) 기술의 발달로 확실히 과거보다 혼자 놀 거리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1998년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권윤주(28)씨가 탄생시킨 인터넷 만화 '스노우 캣(Snow Cat)' 을 '혼자 놀기'의 원조로 꼽는다. '스노우 캣'은 귀찮은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고, 혼자 노는 것을 즐기는 백색 고양이를 내세워 현대 도시인의 고독한 일상을 그린 작품이다. 집단 속에서 부대끼기보다는 혼자만의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이 앙증맞은 고양이는 하루 종일 편의점에서 뭉갤 궁리나 하고, 벽지의 무늬 수를 세는 것을 새로운 놀이로 삼는 기이한 캐릭터다.
존재의 근원적 고독감을 주제로 '스노우 캣'이 넌지시 던지는 메시지는 삭막한 현실에 지친 이들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귀찮으면 안 한다는 의미의 신조어 '귀차니즘', '혼자 놀기' 등 '스노우 캣'이 만들어낸 문화 키워드는 점차 단자화해 가는 젊은 세대의 감수성과 맞아 떨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문학평론가 김동식씨는 최근의 '혼자 놀기' 현상이 과거와는 다른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분석한다. 김씨는 "휴대폰, 인터넷 등 미디어의 발달로 개인의 소통 가능성이 최대한 확장됐지만, 개인은 이렇게 넓어진 소통의 영역 속에서 오히려 자신이 소외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지하철에서 '엄지족(族)'들이 '무슨 역 지나고 있다'는 등 별 의미가 없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엄지 손가락으로 미친 듯이 쳐 보내는 것은 심리적 불안에서 비롯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혼자 놀기'는 사회와 단절돼 가는 개인이 소외를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를 향유의 대상으로 삼는 역설적 유희인 셈이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 '혼자노는' 개그맨 이정수
KBS 2TV ‘개그콘서트’ 봉숭아학당에서 ‘선도부’ 완장을 차고 “혼자놀기의 진수를 보여주겠다”고 큰 소리를 치는 개그맨 이정수(24). 프로그램의 인기 덕에 이제는 ‘혼자 놀기’의 전도사처럼 돼 버렸지만 그가 이코너를 만든 데는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었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나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만연한세태를 꼬집고 싶었어요. 잘못된 것 바로잡는 선도부 복장을 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웃음을 앞세우다 보니 처음 의도한 풍자에서는 좀 벗어났지만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한심한 장난쯤으로 보일 수 있는 ‘혼자 놀기’ 유행 현상도 좀 다른각도로 해석한다. “집단 따돌림, 소위 왕따라는 말이 있지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어요. 그럴 바에는 아예 세상을 따돌려 버리고 혼자 놀겠다는 거죠. 자기 위안에 그칠 수 있지만….”
그가 기상천외한 갖가지 ‘혼자 놀기’ 방법을 쏟아낼 수 있는 데는 8만여명에 이르는 팬 클럽 회원들이 앞을 다퉈 올려주는 아이디어가 큰 힘이 되고 있다. 군대 기피의 수단이 된 문신을 풍자한 ‘징병검사 놀이’, 한 손에는 축구공, 다른 손에는 총을 든 ‘안정환 놀이’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도 ‘시체 놀이’ 같은 끔찍한 사진이 나도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예전처럼 뻣뻣하게 서서 사진 찍으면 재미 없잖아요. 디지털 카메라나 카메라 폰을 이용해서 재미 있는 그림을 만들어보는 거죠. 새로운 문화 현상이라고 이해하면, 그렇게 우려할 것도 없어요.”
곧 ‘우격다짐’을 끝내고 말보다는 몸으로 웃기는 새 코너를 선보일 계획이라는 그는 “‘혼자 놀기’는 본래 계획한 풍자의 묘미를 살릴 수 있게다듬어서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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