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전쟁 와중에 어리석은 관전자들을 감동시켰던 '제시카 린치 일병 구하기'의 영웅 스토리가 한갓 조작된 무용담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워싱턴 포스트가 지난 주 폭로한 이 조작극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이 허구로 드러난 것과 더불어, 전쟁 수행자들이 여론을 기만하고 오도하는 행태를 상징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식민지처럼 점령 통치하는 마당에 사소할 수 있는 이런 진상 폭로가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세상을 보는 안목에 보탬 되는 것은 분명 있을 것이다.당초 미군이 전파하고 언론이 추종한 스토리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넘어서는 전쟁 신화적 요소를 고루 갖췄다. 바그다드로 진격하던 미군 수송부대 여군이 이라크군의 기습에 부상한 채 용감하게 맞서 싸우다 포로가 된 것을 특수부대 작전으로 극적으로 구출했다는 이야기는 지지부진한 전쟁에 불안해 하던 미국의 여론에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잘못된 전략을 비판받던 군은 단숨에 명예와 지지를 회복했고, 전쟁의 정당성을 회의하던 반전 여론을 잠재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애국적인 미국방송 NBC는 이 스토리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기 위한 계약까지 서둘렀다. 그러나 영화가 늘 그렇듯이, 린치 일병 신화도 곳곳에 허점이 있는 것이 이내 드러났다. 미군은 린치 일병이 이라크 민병대의 기습으로 총상과 칼에 찔린 상처까지 입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수용돼 있던 이라크 병원 의료진은 차량충돌 사고로 입은 상처 밖에 없었다고 전했다. 또 미군 특수부대가 극적인 구출작전을 폈다는 병원 주변에는 이라크군이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미군은 부상병을 데려가라는 병원측의 연락을 받은 뒤 답이 없다가 공연히 요란한 작전을 펴는 장면을 연출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엇갈린 주장은 미군에 배속되지 않고 독자 취재한 서구 기자들이 일찍부터 전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미국의 주류 언론은 신화 만들기에 한층 열중했을 뿐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뒤늦은 추적보도에서 총 한방 쏘지 않고 붙잡혀 병원에 후송됐던 린치 일병의 거짓 영웅 스토리를 추종 보도했던 잘못을 반성했다. 어느 국내 학자는 이게 바로 미국 언론의 장점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자기 반성이 미덕이라고 해서, 늘 선의로 볼 것만은 아니다. 대세를 좇아 애국적 왜곡보도를 일삼고서는, 대세가 흔들리는 기미가 짙어지면 자세를 바꾸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칭찬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그 대세 변화는 미국의 전쟁 명분이 송두리째 부정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을 입증한다던 숱한 선전과 보도는 하나 빠짐없이 사실과 거리 먼 것으로 밝혀졌다. 그 가운데는 이라크군이 사격표적용 풍선을 부풀리는데 쓰는 수소 발생장비를 실은 차량을 '이동형 생화학무기실험실'이라고 선전한 사례마저 있다.
물론 전쟁을 주도한 미국과 영국 사회가 거짓된 명분에 바탕한 전쟁의 정당성을 새삼 논란하는 것은 임박한 선거 등 국내 정치 게임과 관련 있을 것이다. 지나간 거짓을 뒤늦게 폭로하는 주류 언론도 전쟁 수행자들이 다시 전파하는 대응 선전들을 충실하게 보도하고 있다. 여론의 비판과 회의가 높아지자 갑자기 알 카에다의 새로운 테러 위협이 부각되고, 종적을 감춘 후세인이 다시 등장하는 따위가 모두 그런 대응 선전으로 의심된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국제문제를 독자 시각으로 분별하고 처신하기는 커녕, 선전이나 오보(誤報) 등을 가림없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행태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북한 핵과 관련된 외부의 온갖 주장과 보도를 회의와 검증없이 옮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래서는 지금 미국 사회가 보여주는 수준의 자기 반성이나 균형 회복도 기대할 수 없다. 이 와중에 여당 국회의원이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마냥 보수 강경으로 기우는 북한 핵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볼 것을 외롭게 촉구하고 나선 것은 말 그대로 대견하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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