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바라보는 봉두완(奉斗玩·68) 천주교 한민족돕기회 회장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사람이다. 명함에 적힌 현직만 10개 가까이 된다. 하나같이 돈이 되기는커녕 제 돈 쓰기도 모자라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 자리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공동대표, 클린인터넷국민운동본부이사장, 성나자로마을돕기회장, 대한적십자사 후원회 부회장…. 누구든 만나면 "제 이름이 봉두완이 아니라 봉사인인 거 아십니까"라며 스스럼없이 안주머니에서 나환우 돕기 등 후원회 가입서 한 장 꺼내는 그다.신문기자 출신으로 1970년대를 풍미한 TV 앵커맨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11,12대 국회외무위원장을 지내며 화려한 인생을 달렸던 그가 언뜻 어울리지 않는 봉사하는 삶으로 선회하게 된 이력에는 김수환(81) 추기경과의 인연이 자리잡고 있다. 그가 참여한 숱한 봉사단체에 김 추기경이 고문, 명예총재로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도 두 사람의 남다른 인연을 말해준다.
김 추기경과의 첫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앵커맨으로 한창 이름을 날릴 때 유신체제에 삐딱했던 김 추기경을 먼발치서 좋아했다.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지만 강론을 듣기위해 주일이면 곧잘 명동성당을 찾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신자가 사제를 존경하며 간혹 뵙는", 그 정도였다.
김 추기경과의 진짜 인연은 스스로 인생의 정점에서 급전직하 추락했다며 낙심천만이던 1988년에 시작됐다. 여당의 13대 총선공천에서 배제돼 좌절하던 때다. "친했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이 됐으니 장관자리 쯤은 내 맘 먹기라고 생각했는데 공천조차 못 받게 되니 배신감에다 충격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3개월 넘게 집에서 두문불출하던 그를 보다 못한 김 추기경이 불렀다. "국회의원이 아무 것도 아닌데 무슨 미련을 그리 갖느냐, 모두 잊고 용서하라고 그럽디다. 배신감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용서하라니. 귀에 들어오기는커녕 반발심만 생깁디다."
김 추기경은 몇 번이나 그를 불러 봉사하는 삶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했지만 쇠귀에 경읽기였다. 그러나 김 추기경의 간곡한 설득에 그의 맹목적인 분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날 아침, 김 추기경이 평소 하던 말씀이 불현듯이 뇌리에 박혔다. "정치는 이제 그만두고 하나님 사업 좀 하세요." 정치판이라는 진흙탕에 다시 끼지 못해 괴로워할 일이 아니라 김 추기경 충고대로 남을 위해 살아보자는 생각이 밀려왔다. 53세. 그는 진짜 새 인생을 시작했다. "자가용 뒷자리 대신 택시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녔지만 홀가분했습니다. 행세하는 자리가 아니라 도움을 요청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이었으나 행복했습니다."
가톨릭에서 하는 크고 작은 자선모임, 여러 북한 돕기 모임에 약방의 감초를 자청했다. 특히 김 추기경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무조건 참여했다.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 한민족복음화추진협의회 총재를 맡고 자신은 회장을 하는 식이었다. 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를 위한 기도회를 주선하는 등 정치인들과 김 추기경을 잇는 가교 역할도 톡톡히 했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김 추기경을 찾는 그는 자칭 '추기경의 영원한 대변인'이다. 그런 그를 김 추기경은 이렇게 말한다. "봉 회장을 30년간 보아왔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기만 하다. 방송하랴, 대학 나가랴, 적십자 봉사하랴, 기도운동에다, 장애인돕기에, 나환우 돕기까지 내가 알고있는 것만도 몇 가지인지 모른다. 정말 돈 안 되는 일에 하루하루가 바쁜 사랑하는 형제다."
그렇다면 그에게 김 추기경은? "정치에 찌들어 좌절한 저를 봉사와 사랑의 길로 인도해준 분입니다." 지난 10여년간, 어렵게 얻은 방송일을 정치풍향에 따라 그만둬야 하는 등 어려움이 되풀이됐지만 과거와 달리 초연해진 것도 다 김 추기경 덕택이란다.
/이동국 기자 eas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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