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아, 입이 없는 것들') 꽃, 나무, 새.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을 지면서도 아픈 소리 한 번 낼 수 없는 것들. 이성복(51) 시인은 다섯 번째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발행)에서 그 입이 없는 것들에게 입을 달아준다. 10년 만이다. 오랜 침묵의 이유를 묻자 "도대체 시를 어떻게 쓰는지 잊어버렸다"고 했다. 잊어버렸다니. '시인 이성복'을 고통과 상처의 다른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그가 다시 노래 하기만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배반처럼 들리는 말이다.돌아보면 그의 시 쓰기가 배반의 연속이었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서 우리를 가둔 세계의 비루함을 내보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남해금산'에서는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는 울음으로 가슴을 죄게 했다. '그 여름의 끝'은 연애시의 절창으로 기억됐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을 내고는 입을 닫았다. "10년 동안 많이 놀았다"면서 웃었다.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새 시집에 실린 시는 125편, 8월 중 메타시(시에 관한 시) 100편을 묶은 시집이 출간된다. 나눠 내면 서너 권은 될 만한 양이다. 그러나 그는 솔직하게 "시와 불화했다. 예전에는 시 없이 못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문학은 내 아이를 배고 있으나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여자 같은 무엇이 돼버렸다"고 했다. 한 시대 그 시편들이 가슴을 뛰게 했던 시인에게 시의 뮤즈가 고개를 돌렸다.
계명대 불문과 교수였던 그가 문예창작과로 옮긴 게 시로 돌아가는 길이 됐다. "문창과 선생이 되니 문학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처럼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무엇을 쓰고 싶어하는지, 어떻게 쓰고 싶어하는지. 그렇게 '아마추어'가 되니까 시가 써지더라." 스스로에게 강제하되 업(業)으로 쓰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연습하듯 쓰고 또 썼다. 이상한 일이 생겼다. 밖에서 온 이미지에 시인이 붙잡혔다.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면 그 이미지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해석이 안 된단다. "그럴 때 이미지에 갇힌 채로 남겨진다. 묘하게도 기분이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시를 '연습'하다가 뜻밖에 얻어지는, 공연 중 '애드립' 같은 무엇이 나오는 데 "재미가 생겼다". 말 다루는 방법을 알게 됐다. 이제 그는 제목만 주면 어떤 시든 쓸 자신이 있다. "제품의 질은 보증할 수 없지만"이란 토를 단다. "10편을 강제로 쓰면 1편은 건질 만하다는 것을, 10편을 얻으려면 100편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도 말했다.
'피어 있는 꽃들을 바라보다가/ 저 꽃들에게도 잔치를 열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잔치 여느라 정신이 없는'에서) 꽃들이 입을 열도록, 왁자지껄한 말 잔치를 벌이도록 하는 것이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며 해야 할 일이다. 이성복 시인은 불행한, 입이 없는 것들을 위해 다시 노래를 부른다. 돌아와서 한없이 반가운 그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써놓고 나면 무슨 소리인지, 왜 이런 시를 썼는지 모르겠다." 그 말이 또 배반처럼 들리다가 그의 '연습으로 쓰는 시'에 생각이 미치면 시인의 그물에 한 이미지가 걸린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시의 독이 몸에 퍼져서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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