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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17> 無爲閑道人 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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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선지식]<17> 無爲閑道人 해안

입력
2003.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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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피란은 가지 않고 뭘 하시오?" "보면 모르오, 감나무 접붙이지요." "아니 이 난리통에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감나무 접은 붙여서 무얼 하게 요?" "그건 모르는 소리요. 농부는 씨 뿌릴 때를 놓치면 아니 되듯이 이 감나무는 지금 접을 붙이지 않으면 버리게 되지 않겠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으면 어찌 하려고요." "어찌 노인은 죽는 것은 알면서 사는 것은 모르오? 감나무야 사람이 죽고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소. 우리가 감을 못 따먹으면 다른 사람이 따먹을 것이고 다른 사람도 못 따먹으면 까막까치라도 와서 따먹게 될게 아니오."('해안집', 전등사·전등선림 편) 1950년 한국전쟁 직후 내소사 지장암에 주석하고 있던 해안과 촌로가 주고 받은 대화다. 모두 피란을 떠나고 해안 홀로 절을 지키고 있었다. 평상심과 일상사가 진여(眞如)임을 해안은 이 일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목탁소리 나자 종 울리고 또 죽비소리에(鐸鳴鍾落又竹 ·탁명종낙우죽비)

봉황은 은산철벽 밖으로 날았도다(鳳飛銀山鐵壁外·봉비은산철벽외)

만약 나에게 기쁜 소식을 묻는다면(若人問我喜消息·약인문아희소식)

회승당 안에 만발공양이라 하리라(會僧堂裏滿鉢供·회승당이만발공)

개오(開悟)의 기쁨을 노래한 해안(海眼·1901∼1974)의 오도송이다. 봉황은 속세의 이름이자 법명이 봉수(鳳秀)였던 해암 자신을 이른 것이리라. 바리때에 밥을 수북하게 담아 대중에게 베푸는 만발공양은 저절로 자비심을 불러일으킨다. 7일간의 용맹정진은 생사를 건 승부였다. 결국 해안은 봉황이 되었다. 그리고 은산철벽(銀山鐵壁) 위로 훨훨 날아 대자유를 획득했다.

은산철벽의 화두는 해안이 선택했다. 은사 학명(鶴鳴) 용맹정진 첫날 해안에게 대중을 상대로 소회를 밝히라고 지시한다.

"한 사람이 여행을 하는 데 갑자기 맹수가 쫓아왔다. 왼쪽과 오른쪽에는 깊은 강이 흐르고 앞에는 은산철벽이 가로막고 있어 좌역난(左亦難) 우역난(右亦難) 진부득(進不得) 퇴부득(退不得)이라. 살 길이라고는 은산철벽을 뚫고 나가는 도리 밖에없었다."

바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다름 아니었다. 5일째 되던 날 해질녘 지네 한 마리가 선방에서 헤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지네도 은산철벽을 뚫고 나갈 구멍을 찾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이에 지네는 해안도 모르게 선방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저녁 공양시간이 되었다. 목탁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종소리에 이어 방선(放禪) 죽비소리에 갑자기 온몸이 서늘해지면서 형언키 어려운 환희의 세계가 찾아온다. 그리고 스승과 인가의 법거래가 시작됐다.

"알았으면 일러라."

"봉비은산철벽외(鳳飛銀山鐵壁外) 올시다."

"철벽 안은 무엇이냐?"

"이 것이올시다."

"저 것은 무엇이냐?"

"이 것이올시다."

이에 조실 학명은 차를 따라 놓고 "손을 대지 말고 마셔라" 고 덫을 놓았다.

"차 맛이 매우 향기롭습니다." 해안의 답에는 분별의 때가 묻지 않았다.

해안의 출가에는 불연(佛緣)이 작용했다. 고뇌와 좌절에 따른 선택이 아니었다. 서당에 다니던 해안은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해안은 붓장수로부터 내소사에 고매한 한학자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해안은 부모를 졸라 내소사로 갔고 유학자 고찬(高讚)을 만난다. 고찬의 주선으로 해안은 대선사 학명과 만허(滿虛)를 친견한다. 구도의 길에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새벽의 맑은 종소리와 목탁소리, 그리고 스님네의 염불소리가 나를 꼬여서 머리를 깎게 된 첫째 동기가 되었다. 늙은 스님네가 조는 모습도 좋았다. 마치 수백 년 되어서 줄기만 남은 고목처럼 알맞게 마른 홍안백발의 노승이 삽살개 눈썹을 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란 한 폭의 신선도였다. 부귀영화도 나는 싫다, 천당 지옥도 나는 몰라라, 부처도 성인도 내 알 바 아니다, 하고 한가롭게 조는 노승…." 해안이 술회한 출가 동기다.

목탁소리는 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부처의 음성이요 종소리는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자비의 서원을 담고 있지 않은가. 염불하는 스님네의 입가에선 청련과 홍련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출가 당시 13세의 어린 나이로는 믿기 지 않을 정도로 해안은 무욕의 세계에 다가가 있었다.

"수행인들은 마음을 떠나서 다른 공부를 할 수 없을진대 마음을 무엇이라 불러야 참 이름이 될 것인가.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탈 줄 알아야 하며, 구멍 없는 피리를 불 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참 마음의 이름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마음으로만 찾을 때 도리어 수행의 함정에 빠진다는 사실을 해안은 늘 경계했다.

번뇌의 숲을 헤치고 초월의 문에 들어선 해안의 삶은 무위진인(無爲眞人)의 그 것과 다름없었다. 무위진인, 곧 도인은 한가하다. 할 일이 없어 한가한 게 아니다. 해안은 학문을 여의었고 인위를 넘어 자연 그대로의 경지, 지혜의 대지 위를 거닐게 됐다.

해안은 제자 대접 방법도 남달랐다. 금강경을 외우지 못하면 제자로 받아주지 않았다. 금강경의 본이름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로 번뇌를 베어 피안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하는 경전이다. 공(空)의 사상을 공이라는 단어를 단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고 전개하는 금강경은 대승불교의 시작이자 완성이라고 흔히 말해진다.

금강경의 무주(無住)·무상(無相)의 논리는 해안불교의 뿌리가 되고 있다. 무주는 집착의 버림, 무상은 모든 현상은 진실한 모습이 아님을 일깨우는, 공사상의 실천논리다. 그래서 보시 중에서도 무주상보시를 으뜸으로 여긴다. 남에게 베풀었다는 자만심이나 생각조차 떠난 마음, 자비심만이 충만한 보시다.

해안의 육신의 집에도 어느덧 적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74년 3월9일 새벽 해안은 혜산(慧山) 동명(東明) 등 제자들을 불렀다. "내가 죽거든 제사는 생일날(3월7일)에 지내라. 실은 생일날 가고 싶었지만 번거로울 것 같아서 오늘 가는 것이니 그렇게 해라. " 해안은 한 마리 봉황이 되어 적멸의 세계로 날아갔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매일을 한결같이 "一如"의 가르침

"공부하는 방법은 다만 일여(一如), 두 글자만 염두에 두면 된다. 일여는 한결같이 한다는 뜻이다. 옷을 입고 밥을 먹을 때나, 가고 올 때나, 앉고 누울 때나 세수하고 화장실을 갈 때나, 조금도 다름 없이 마치 물이 흘러가듯 한결같이 화두를 지어가는 일이 일여하게 공부를 하는 것이다."

해안은 평상심이 진리임을 누구보다 강조한다. 원래 마음은 하나다. 다만 감정과 상황에 따라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춤을 춘다. 마음의 변화는 대립과 차별에서 나온다. 깨달은 사람은 차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범부들은 희로애락에 매달려 마음자리를 잊고 살아간다. 비록 같은 마음이지만 깨달은 사람과 범부의 마음에는 이처럼 하늘과 땅 사이만큼의 거리가 생긴다.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라는 화두가 있다. 중국 남송의 무문혜개(無門慧開)가 화두를 모아 평석을 한 '무문관(無門關)'에 실려 있다. 무문은 불심을 말한다. 당나라 때 조주(趙州)와 스승 남전(南泉·남전으로 읽음)의 법담에서 탄생한 화두다.

"도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평소의 마음이 도지, 도가 따로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 도를 붙잡을 수 있습니까?"

"잡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면 잡을 수 없다."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도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도는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도 없다. 생각으로 아는 것이라면 그건 망상이 된다.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하면 자각이 없는 것이다. 안다든가 알지 못한다든가 하는 분별을 없애면 바로 거기에서 도가 나타난다. 그 것은 마치 맑게 개인 하늘 같아서 분별이 끼어 들 여지가 전혀 없다." 조주는 이 말을 듣고 대오(大悟)했다. ('선 이야기'·지우 지음)

"도는 가까이 있는데도 멀리서 찾는다." 맹자(孟子)의 말이다.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평상심이나 일상의 모든 것이 진리다. 여기서 도는 불자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규범, 상식을 말한다. 해안은 도가 이렇듯 일상적인 것이니 매일의 삶 그 자체도 도의 모습이어야 마땅하다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판에 박힌 생활을 시시하게 여긴다. 그래서 깨달음의 세계를 존귀하게 여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모두 분별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연보

1901.3.7. 전북 부안 출생, 속성 김해 김(金)씨

1914 부안 내소사에서 출가, 법호 해안

1917 장성 백양사에서 사미계 수계

1918 백양사에서 개오(開悟)

1922 중국 베이징(北京)대에서 2년 수학

1946 김제 금산사 주지, 서래(西來)선림 개원

1969 불교전등회 대종사 추대

1974.3.9.(음력) 세수 73, 법랍 57세로 입적(入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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