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초 우리사회는 불과 2년전 서울의 봄과는 정반대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군부가 계엄령을 해제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대학생들의 시위와 유인물 살포가 잇따랐고, 종교계와 노동계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었다. 군부독재정권은 배후로 이른바 '학림그룹'을 지목했고 나를 '수괴'로 붙잡았다. 나에겐 사형을 구형했다.사형!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사형이 구형되고 신속한 집행을 우려하는 분위기마저 느껴지자 정말 '죽음'이 직면한 현실로 다가왔다. 죽음이 다가온 것이다.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하긴 실제 그렇게 숨진 전례도 있지 않았던가. 자신을 추스르며 살아온 31년의 짧은 삶을 되돌아보았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어려운 세상을 헤쳐나가고자 다짐했던 동지들과의 영원한 이별이 가슴을 메이게 했다.
어느날 구치소에서 그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사형구형을 받으면 자살을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수갑과 포승으로 24시간내내 온몸을 묶기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다. 이내 잠을 깨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혹시 내일이라도 언도하고 바로 사형집행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살아있을 시간이 얼마나 될까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갑자기 '아! 내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깨달음이 번개처럼 왔다. 눈을 들어 창 밖을 바라보니 서울 서대문 현저동 구치소 뒷산의 겨울나무가지가 보였다. 앙상한 나뭇가지였다. 그런데 그 삐쩍 마른 나무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이제 너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 나뭇가지가 어떤 아름다운 꽃보다 환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 느낌이 이상해 복도 건너편 방에 잠들어 있는 소년수들을 쳐다보았는데 그 아이들도 너무 예뻐보이는 게 아닌가. 당장이라도 건너가 꼭 껴안고 앞으로 이런 데 들어오지 말고 잘 살아라 하고 다독여주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간 마음속에 있었던 원한과 증오의 덩어리도 봄눈 녹듯 사라졌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도 따지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고 나를 조사한 검사도 하고 싶어서 했을까, 미움과 원한을 갖고 세상을 하직할 수는 없지, 모두 용서하고 첫 울음을 터뜨렸을 때처럼 빈 마음으로 돌아가자….
기상나팔이 불고 어수선해진 사동(舍棟) 여기저기서 재소자들이 어젯밤에 좋은 일 있었느냐고 인사를 건넸다. 나도 모르게 내 얼굴도 너그럽고 온화해졌던 것이다. 후에야 이런 마음의 변화과정을 종교적으로 회심(悔心)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다.
이 태 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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