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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청계천 30년 터줏대감 복원협의회장 하성기씨 청계천 頌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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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청계천 30년 터줏대감 복원협의회장 하성기씨 청계천 頌歌

입력
2003.06.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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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청계천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 아이도 버리고 주워 오는 곳. … 청계천은 서울의 하수도였다. …"건축가 서현씨가 쓴 '우리 거리 읽기'에서 청계천 대목은 이렇게 시작된다. 제목도 '그늘진 청계천'이다. 그 말대로라면 썩은 개천을 덮고 공룡 같은 상가들을 세우고 고가도로를 올린 것 모두가 이 곳에 햇볕을 들이려는 노력이었으리라. 그러나 장구한 역사적 배경까지 갖춘 청계천 그늘에는 쉬이 볕이 들지 않았다. 스물 둘의 전태일(全泰壹)이 온 몸을 불살랐던 일 역시 그 어둠을 걷어내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엔 양면이 있는 법. 습한 그늘 속에선 포자가 번지듯 새 생명이 움트고 번식해나가기 마련이다. 청계천도 그랬다. 온갖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물산이 모여들면서 이 곳은 서울에서 가장 다양하고 생명력 넘치는 시장이 됐다.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하천복원공사를 앞두고 또 다른 변화를 맞고있는 청계천 상가를 찾았다. 청계천복원협의회장 하성기(河聖基·51)씨가 시공을 넘나드는 어려운 가이드 역을 기꺼이 맡아 주었다.

사실 40대 이상의 서울 시민이라면 청계천에 관한 추억 몇 쯤은 다들 갖고 있을 터이다. 학창시절 공부깨나 하는 진지한 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싼 값에 교과서나 참고서를 사러 이 곳 헌 책방들을 돌아다녔을 것이고, 이공계통에 관심있는 학생이었다면 '광석(鑛石) 라디오'를 조립하려 전기방을 뒤져가며 안테나와 코일, 방연석 등을 구했을 것이다. 좀 바람기가 들었다면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잡지나 조악한 '빨간책' 따위를 손에 넣기 위해 곁눈질로 이 거리를 서성거렸을 것이며, 더 나아간 학생이었다면 당대 '고고클럽'의 메카와도 같았던 풍전호텔 나이트클럽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것이다.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오디오기기 판매업체 (주)원일음향을 운영하고 있는 하성기씨는 여기서 30년을 보낸 터줏대감이다. 그 역시 고교 때부터 음향기기에 취미가 있어 들락거리다 70년대 중반 버젓한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이 곳에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청계천에는 유난히 이북, 특히 함경도 출신들이 많았다. 전쟁 피난민들이 그늘진 골목마다 점방을 열고 다시는 뽑혀 나가지 않을 새 뿌리를 단단하게 박았다. 광장시장 포목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하씨 가게 주변에서도 이름 뒤에 아바이를 붙인 '광명 아바이' '경인 아바이'하는 호칭들이 흔하게 들렸다. 이젠 거의 타계하거나 떠났지만 그들의 강인한 생활력은 지금의 청계천 상인들에게 그대로 살아있다.

"청계천 주변에서 다뤄지는 물품이 몇 종이나 될까요. 몇 백? 몇 천?" 하씨는 잠깐 도무지 말 같지 않은 걸 물어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구할 수 없는 게 뭐냐고 물어보라'는 뜻으로. "이 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곳입니다. 아마 식료품(식당, 술집은 물론 있다) 빼고는 다 있을 겁니다."

그의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님은 평화시장서부터 세운상가 일대에 이르기까지 청계천 길을 따라 조금만 발품을 팔거나, 인터넷의 청계천 관련 사이트를 잠시만 들어가 보면 곧 알게 된다. 가구나 의류, 최첨단 전자제품, 서적, 장신구 등의 생활용품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기계류나 그 부품에서 등산, 낚시, 희한한 애완동물들을 포함한 갖가지 취미용품까지, 큰 제목만 대충 읊어도 책 몇권 분량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래서 청계천에는 신화(神話)가 있다. 예전부터 인구에 회자돼 온 그 유명한 얘기들이다. '청계천에서 육군 1개사단 정도를 입히고 무장시키는 건 문제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미사일 같은 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든지 하는. 하씨 조차 "가능하지 않을 것도 없다"고 할 정도니까.

그래도 "설마 이런 것까지야"하는 이들이 있을 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상상력을 최대한 쥐어짜서 꼽아보라. 미군 전투모? 옛날 브라더 미싱? 지금은 사라진 대나무 손잡이의 비닐우산? 군고구마용 드럼통? 닭 털 뽑는 기계? 산부인과용 분만대? 수의(壽衣)나 관(琯)? 명품 이미테이션 시계? 학창시절 우리 학교의 학생증? … . 이런 건 또 어떨까. 가죽다이어리의 떨어져나간 스프링만 구하고 싶다면, 시골 방앗간의 구형모터가 고장 났다면, 아예 막 나가서 좀 변태끼 있는 이가 섹스대용품 여자인형을 구하려 한다면,…. 여하튼 무조건 청계천에 나가보라.

다양성 만이 아니다. 앞서의 목록에서 감 잡았겠지만 청계천을 다른 시장 상가와 차별하게 하는 건 통시성(通時性)이다. 여기선 매일 새로운 제품들이 가장 발빠르게 들어온다 해서 이전 물건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깊숙한 골목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갈 뿐이다. 도대체 물리적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한정된 공간 속의 끝없는 깊이, 그 또한 청계천이다.

하씨의 전문분야인 전자·오디오 쪽도 마찬가지다. 그는 원일전자로 시작해 10여년 전부터는 원일음향으로 상호를 바꿔 교회, 기업 등에서 쓰는 최첨단 프로페셔널 오디오(업계에서 홈 오디오와 구별해 쓰는 용어다)를 취급해오고 있다. 세운상가 1층 열여덟평 가게에는 대형 JBL스피커와 마이크, 앰프 등의 가득 들어차 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중소기업의 매출은 간단하게 넘어선다. 입구에 아무렇지않게 놓여있는 콘솔믹서 한대 값이 4,000만원이라니까. "청계천 일대의 좁은 가게주인들이 다 수십억대 부자들이라는 얘기가 맞습니까?" "글쎄, 그런 분들도 있고…. 뭐 그렇죠." 하씨는 빙그레 미소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가 처음 발을 디딘 시기는 월남전 여파를 타고 전자상가가 한창 뻗어나가기 시작할 때였다. 국산이라야 금성과 아남 TV, 신일선풍기, 별표·독수리표 전축 정도 밖에 없었으나 귀환장병들이 갖고 온 일제 AKAI 릴녹음기에 소니, 파나소닉 TV·라디오들까지 쏟아져 들어와 물량은 넘쳐 났다. 그 때 신제품 판매만큼 호황을 누린 곳이 중고품 수리업이었다. 수명이 다된 오리온전자 브라운관을 뜯어 전자총을 재생하고 브라운관막도 만들고 메끼(도금), 후끼(페인트)에, 뻬빠(샌드페이퍼작업)질까지 하고 나면 금방 새 것처럼 번쩍번쩍 되살아 났다. 녹 슬거나 망가진 잭 따위는 모나미볼펜을 달궈서 간단하게 대용품을 만들어 끼웠다. "모든 상인이 대단한 엔지니어들이었습니다. 스피커 정도는 합판을 아교로 붙이고 코일을 재생하든지 해서 거뜬하게 만들었지요."

청계천 역사에서 뺄 수 없는 게 밀수품이다. 미군 PX 등지에서 빼돌려진 RCA, 제니스, 제네랄TV 등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수입자유화 조치가 취해질 때까지 기승을 부렸다. 그러니 이미 30년전서부터 청계천에서는 구하지 못할 물건이 없었던 셈이다. 단속 나온 세관원들과의 쫓고 쫓기는 실랑이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사기꾼도 많았지요. 미군에게서 소니 비디오(베타)를 수백만원에 받아와 풀어보면 딱 그만한 크기의 12캔 맥주가 들어있었다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하지만 불법이니 항의할 방법도 없었지요."

그 시대의 잔상 역시 청계천 한쪽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하씨의 안내로 미로와 같은 주변 골목을 들어서니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가게마다 고물 전축에서 떨어져나온 스위치, 이젠 망치로나 쓸만한 옛날 무전기, 반쯤 탄 진공관, 낡은 코일, 안테나, 트랜지스터, 주먹만한 콘덴서… 전문지식이 짧아 이름을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세상에, 어떻게 지금도 이런 것이" 소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갖가지 부품이 수북이 쌓여있다. "이런 게 팔리느냐"는 물음에 하씨는 "저래 뵈도 저 주인분들 자식 다 잘 키우며 산다"고 답했다.

연전에 하씨의 오랜 고객인 70대 노인이 카트리지(오디오 턴테이블의 바늘이 꽂히는 부분?요즘도 LP 마니아들이 많다)가 망가졌다며 도움을 청해와 이런 가게들을 함께 뒤진 적이 있었다. 이틀 만에 황학동 인근에서 커버가 깨져나간 낡은 턴테이블에 꼭 같은 카트리지가 달려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몽땅 1만5,000원에 샀다. 노인은 "사실 이 카트리지 하나만 해도 20만원은 줘야 한다"며 어린애처럼 눈물을 글썽이더라고 했다.

확실히 청계천에서는 진한 사람 냄새가 난다. "여긴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것들이 있지요. 정과 믿음, 싼 가격 같은 것입니다. 좁은 계단으로 북적대도 학생 때부터 정든 고객들이 꾸준히 찾아오는 게 그 때문이지요."

협의회를 맡은 뒤로 하씨는 눈코 뜰새 없이 바빠졌다. 무엇보다 고가도로로 하루 18만대나 지나던 차량들이 내려오면 그렇잖아도 복잡한 청계천 주변을 시민들이 더 피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로 인한 상인들의 손실을 최대한 보전하는 것이 그의 숙제이다. "아무래도 주변 환경이 많이 바뀌겠지요.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청계천 상권은 보존돼야 합니다. 이런 보물 같은 곳은 어디에도 없고 인위적으로 다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요."

애당초 청계천은 짧은 기사 한편에 가둬 담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게 얼마나 당치않은 과욕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그 심연 속에 한발 들여놓는 순간으로 족했다.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한 곳, 늘 그 모습이면서 또 늘 변화하는 곳,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이 한데 뒤엉켜 정신없이 돌아가는 곳, 그게 청계천이다. 하지만 이 또한 청계천의 지극히 일부만을 본 소회에 불과할지니.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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