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말 납치사건 피의자 조모(45)씨를 직접 조사했던 서울 강남경찰서 형사계 한모(36) 경사. 사건 처리 직후 한 경사는 조씨로부터 "인질 납치극을 도와주면 술집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위험한 뒷거래를 제안 받았다. 이미 조씨는 한씨가 최근 4억원에 가까운 빚더미에 몰려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였다.2년 전 음주 교통사고를 내면서 피해자 가족에게 합의금 3,000여만원을 지불했던 한씨는 최근 아내가 운영하던 음식점마저 경영난에 빠졌다. 고민을 거듭하던 한씨는 현직 경찰관이라는 신분도 잊은 채 조씨의 공범으로 납치사건에 뛰어 들었다.
4월15일 오후11시께 주가조작으로 수백억원대의 재산을 모은 증권브로커 김모(34)씨를 송파구 오륜동 모 아파트 엘리베이트 앞에서 납치하려다 실패했다. 조사결과 한씨는 직접 행동대원을 불러 3일 동안 김씨를 미행하면서 납치장소를 물색했다. 범행 현장에서 한씨는 직접 흉기와 테이프를 들고, 김씨를 폭행·협박했다. 강력사건 처리의 주역이었던 한씨가 마지못해 납치사건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씨는 첫번째 납치가 미수에 그치자 조씨에게 다음 범행 대상을 직접 알려주기까지 했다. 조씨의 지시를 받은 한씨 등은 4월20일 새벽1시께 양천구 신정동 모 아파트 앞에서 역시 주가조작으로 거액을 모은 김모(32)씨를 납치한 뒤 김씨의 가족들에게 35억원을 요구했다.
강남과 여의도 일대에서 증권브로커로 활동했던 김씨가 틀림없이 현금을 보유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 그러나 김씨의 가족들을 통해 김씨가 부채더미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3,000여만원만 받고, 30여시간 만에 풀어줬다.
한씨의 범행 소식을 전해들은 동료 경찰관들은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한씨가 범행 직후인 4월21일 사표를 제출했을 때만 해도 "힘든 경찰 그만하고, 식당이라도 할 참"이라고 했던 그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한 동료는 "누구보다 성실히 근무해 상상도 못했다"고 허탈해 했다.
육군 중사 출신인 한씨는 1992년 3월 순경 특채로 경찰에 입문했다. 태권도 유단자였던 그는 청와대 경호 업무를 담당하는 101경비단에 근무하면서 경호업무 공로로 8차례나 표창을 받았다. 덕분에 남들은 10여년이나 걸리는 경사 계급장을 4년 만에 달았다. 98년 9월 강남경찰서로 옮긴 뒤에도 파출소, 형사계를 옮겨 다니며 상해치사범 검거로 표창을 추가했다. 그러나 늘어나는 빚더미 속에서 한씨는 '모범경찰관'이라는 훈장을 너무 쉽게 벗어 던졌다.
/정원수기자nobleli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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