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당시 문화부 장관)이 현대로부터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자 당시 여권의 정치자금 상황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총선 자금인가 현재까지 나온 비자금 수수설은 크게 세 가지로서 우선 2000년 4월 중순께 박 전 실장이 150억원 상당 양도성예금증서(CD)를 현대로부터 받았다는 것. 다음으로 몇몇 언론이 보도하고 있는 '400억원 제공설'과, 마지막으로 '오마이뉴스'가 보도한 '2000년 봄 여권 실세 K씨에 대한 현대 정몽헌 회장의 400억원 베팅설'이 있다. 박 전 실장은 이 모든 설에 등장한다.
야당은 이들 비자금 수수설을 모두 여당의 4·13 총선자금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1년 말 "4·13때 원없이 써봤다"고 말했던 것까지 새삼스럽게 도마 위에 올랐다. 세가지 설중 총선자금과 연결지을 수 있는 것은 '오마이뉴스'의 보도뿐이다. 돈이 건너갔다는 시점이 2000년 봄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총선에 투입되기에 별 문제가 없다. 돈을 받은 것으로 거론된 K씨가 총선 당시 선거자금 조달과 운영에 깊숙이 간여했다는 정황도 충분하다.
그러나 150억원 CD 제공설과 400억원 제공설은 총선자금과는 별 연관이 없어 보인다. 선거일이 4월13일이기 때문에 선거자금으로 쓰려면 적어도 그 전에 돈이 건네졌어야 한다. 하지만 박 전 실장의 구속영장에 나타난 돈 제공 시점은 4월 중순이다. 그것도 현금화하는데 시간이 필요한 CD를 준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총선자금으로 보기에는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박 전 실장과 K씨 세 가지 설에 등장하는 정치인은 박 전 실장과 여권 실세 K씨 두 사람이다. 이중 K씨는 2000년 4월 여권 정치자금 흐름의 본류에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그는 민주당의 총선 공천을 주도했을뿐 아니라 여러 후보에게 '실탄'을 지원했다는 게 정설로 돼 있다.
박 전 실장은 당시 K씨를 "형님"으로 부르며 무척 가깝게 지냈다. 동교동 신·구파 분류에서 두 사람은 줄곧 한 묶음이었다. 따라서 '오마이뉴스' 보도 중 박 전 실장이 현대와 K씨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는 부분은 전혀 무리한 가정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사실만 가지고 오마이뉴스의 보도가 맞다고 판단하기는 이르다.
민주당과 박 전 실장 그러나 여권 핵심인사들은 "박 전 실장이 직접 민주당의 정치자금 조달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박 전 실장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직계로서 청와대를 주로 상대했다"는 얘기다. 또 "그 때만 해도 민주당이 여당으로서 힘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박 전 실장을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금을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박 전 실장은 상당수 당 핵심인사들과 그다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2000년 초·중반 권노갑 고문, 김봉호 당 후원회장, 김옥두 사무총장 등이 여권 정치자금과 관련해 역할을 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또 총선 이후 전당대회를 의식했던 한화갑 박상천 정대철 의원과 김중권 전 대표 등 계파 보스급 인사도 정치자금과 관련해 '독자생존'을 모색했을 소지가 있다.
결국 2000년 당시 여권 내부의 역학구도, 민주당의 정치적 위상 등을 종합해볼 때 박 전 실장이 현대의 돈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돈이 곧바로 민주당에 보내져 쓰였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설사 민주당에 유입됐더라도 한두 군데 '정거장'을 거쳤을 가능성이 있다. 배달사고설, 청와대 통치자금설, 정상회담 준비자금설, 박 전 장관의 개인 정치자금설 등에 상대적으로 눈길이 더 가는 건 이런 정황 때문이다.
/박정철기자parkj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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