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만큼 옷이나 신발에 대해 눈 높이가 높은 국민들이 또 있을까.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패션감각 뛰어난 국민을 꼽으라고 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한국인이 선두에 설 것이다. 휠라 사업을 10년 넘게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다.한국인들은 옷을 고르는 눈썰미도 남다르지만, 품질에 대해서도 까다롭다. 한번만 입어보고 빨아봐도 대번에 안다. 휠라 코리아가 출범하면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쓴 부분도 한국인의 눈 높이에 맞는 제품 개발이었다.
한국인의 남다른 패션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 입맛에 맞는 스타일의 옷이 중요하다. 그래서 휠라 코리아는 다른 브랜드와는 달리 한국시장을 겨냥한 독자적인 상품을 내놓았다.
사실 휠라가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다른 브랜드에 비해 브랜드 파워가 앞섰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일부 브랜드의 옷과 신발이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당시 미국 시장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규모가 작았던 한국시장에서 다른 브랜드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휠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화 전략에 따른 독자적인 상품 개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휠라 코리아는 출범초기부터 본사와 별도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디자인을 자체 개발했고, 최소한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시 유행하던 해외 주문생산 방식이 아닌 국내 생산만을 고집했다.
한마디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사용한 것이다. 미국인이나 유럽인을 염두에 두고 만든 옷이나 신발이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른 브랜드가 본사의 디자인을 그대로 따와 제품을 내놓기 바쁠 때 한국적인 제품 개발에 주력하는 발상의 전환은 먹혀 들어갔다. 이 같은 발상의 전환은 신발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70∼80년대 황금기를 구가하던 한국의 신발 산업은 당시 인건비가 치솟자 생산공장을 모두 동남아로 옮겨갔다. '신발 사업은 이제 사양 산업인 만큼 더 이상 재미가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생산과 개발 등으로 나눠진 신발 사업의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던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생산부문에서 비록 경쟁력을 잃었을지 몰라도 개발이나 자재 산업은 오히려 경쟁력 확보의 기회를 맞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철저한 국제 분업 시스템을 도입하고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디자인은 미국, 금형 개발과 원단 및 가족 등 자재 공급은 한국, 생산은 동남아로 나눠 오히려 신발 사업의 활로를 찾은 것이다.
물론 한국화 전략에 따른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제품 개발이 쉽지 않았다. 한국인을 사로 잡기 위한 독특한 디자인과 색상을 찾기 위해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제품 개발이 중요하다는 것은 휠라 코리아 일을 하기 전 개인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좌절을 겪으며 깨달은 사실이었다. 때문에 나는 당장 나오는 것이 없더라도 제품 개발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휠라 코리아 제품 개발부 직원들은 마치 프리랜서처럼 조직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일했다. 심지어 해외 출장도 사장 결재 없이 스스로 결정해서 다녀왔다. 나는 그들이 꼭 봐야 할 해외 패션쇼가 있다면 수시로 보냈다.
물론 출장을 다녀온 결과물은 반드시 제출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회사에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하지 않고 전문가 대우를 해주는 만큼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또 과학적인 개발작업을 위해서 50여명의 모니터 요원들을 따로 채용해 상품 개발부터 시작해 제작, 판매, 재고 등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분석했다. 모니터 요원들의 분석 자료들은 모두 전산 처리해 중요한 자료로 남겼다.
특히 브랜드 사업으로는 드물게 전산화 작업을 일찍 서두른 것이 두고두고 큰 효과를 발휘했다. 제품 개발은 물론, 품질 관리, 영업망 점검 등 경영 전반에 대해 과학적 분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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