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시에 '탐진농가'라는 작품이 있다. 그 중 한 수를 읽어보자. "부자집 만 꿰미 돈 아끼지 않고/ 썰물 때 돌을 쌓아 바닷물 막아놓네/ 조개 줍던 옛 땅에 지금은 벼를 심어/ 어제의 개펄이 기름진 논이 됐네."탐진은 지금의 강진이다. 개펄이 많은 곳이고, 개펄은 논을 만들기에 적당하여 정약용의 시대에 이미 논으로 개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개펄을 논으로 만든 일이라면 강진만 그런 것도 아니다. 강화도의 드넓은 논도 상당 부분은 숙종 때에 바다를 메워 얻은 것이다. 간척의 역사는 이처럼 오랜 것이다.
다산은 강진의 개펄을 논으로 바꾼 것에 대해 무한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실학자 다산다운 생각이다. 다산이 진단한 조선후기 사회는 병들고 가난한 사회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
농업 이외의 산업이 존재하지 않던 사회에서 어떤 대안이 있었을 것인가.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외에 딴 길이 없었다. 종자와 농기구의 개량, 그리고 경작지를 늘리는 것이야 말로 그 당시 지식인이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다산이 강진의 개펄이 논으로 바뀐 것에 대해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간척 뿐만이 아니었다. 다산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윤기란 사람은 자손들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글로 남긴다.
그 중 하나가 '언막이' '보막이'로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유혹하는 사람에게 넘어가지 말라는 당부다. 언막이 보막이란 수리(水利)가 용이한 곳에 '제언'과 '보'를 쌓아 논을 얻는 방법이다.
윤기의 당부는 언막이 보막이로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조선후기에 토지의 개발, 즉 논의 개발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새만금사업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간척을 통해 땅을 늘리는 것이 절대선인가. 조선후기라면 그렇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 것인가. 어떤 일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법이다.
새만금사업의 추진과 중지를 위해 시위를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대화로 슬기롭게 해결할 수는 없는가. 다산이 살아 있다면, 물어보고 싶다.
강 명 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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