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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아주 오래된 목욕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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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아주 오래된 목욕탕

입력
2003.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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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갈 때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구마 고속도로를 가다 보면 현풍이 나오고, 그곳 인터체인지를 조금 지나면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이 있다. 구지 마을 입구에 애송이 벚꽃이 만발해 있는 광경을 보면 저절로 흐믓해진다. 입구엔 '구지마을 3대 수칙'이 붙어 있다. '어른 존경하기, 남의 말 좋게 하기, 마을 깨끗이 하기.'이 곳 아주 조용한 시골에는 간판도 없는 허름한 목욕탕이 있다. 내가 항상 들르는 곳이다. 50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우연히 목욕탕에 처음 들어섰을 때 목욕하러 온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꾸 들르다 보니 정이 새록새록 들고 향수를 자극하는 어떤 무엇이 배어 나왔다. 목욕탕 안에는 어른 4인이 들어가면 가득찰 정도의 시멘트 온수탕이 가운데에 있고, 페인트칠이 벗겨져 나간 사방벽에는 녹슨 파이프가 얼기설기 연결돼 있다. 그리고 케케묵은 조그만 거울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아, 목욕탕 옆에는 황토방이 있다. 황토를 서투른 미장질로 더덕더덕 붙여놓은, 글자 그대로 황토방이다.

나는 황토방에 들어가면 벽쪽으로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기도 한다. 마치 계룡산 토굴에서 면벽수행을 하는 기분이다. 조용하고 아늑한, 고향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된다. 몸은 가뿐해지고 마음은 편안해 진다. 손님은 나 혼자일 때가 대부분이고 기껏해야 2인이다. 늙수그레한 촌로라면 나같은 젊은이가 신기한 듯 구경할 때도 있다.

이런 목욕탕에 온 손님이라면 이 동네 친척집이나 무슨 사연으로 온 사람이겠거니 하는 눈초리다. 희소가치로 따지자면 우리 나라에서 이런 목욕탕은 이 곳 뿐이지 않나 싶다.

목욕탕 건물 입구에 들어서 조그만 수금 창문을 비집고 돈을 내밀면, 인심 좋아보이는 중년 아주머니가 얼굴을 활짝 펴면서 반긴다. "어디 누구 네 집으로 오셨능기요?"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더. 여기 목욕탕이 좋아 한번씩 들립니더."

목욕탕이 좋다는 말에 주인 아주머니는 기분이 좋은지 더욱 상냥해진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자랑스런 표정으로 소근거린다. 순박하고 평화스러운 촌부의 얼굴이 좋아 보인다. 이런저런 정경이 좋아 근처를 지날 때면 나는 몸이 근질거리지 않아도 반드시 구지 마을의 목욕탕을 찾는다.

/윤행원·경기 평택시 신장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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