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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 대통령의 사람들]<16>권력의 균열 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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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비화 - 대통령의 사람들]<16>권력의 균열 ⑬

입력
2003.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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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제를 하느냐, 안 하느냐를 결정해야 할 시점이 시시각각 다가오던 1999년 7월 12일 이른 아침, 이만섭(李萬燮) 국민회의 고문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김 대통령은 "이 고문이 총재 권한대행을 맡아주시오. 여기는 청남대인데 곧 올라갈 테니 청와대에서 만납시다"라고 했다.여름 휴가차 청남대에 머물고 있던 DJ는 JP를 비난한 김영배(金令培) 총재 권한대행을 이틀 전(10일) 경질하고 후임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DJ는 내각제 유보를 위해 JP와 갈등을 빚었다는 이유만으로 총재 대행을 바꿀 정도였다.

오전 9시 DJ는 이 고문과 독대한 자리에서 후임 당직자 명단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다. 그 내용은 '사무총장 한화갑(韓和甲), 정책의장 임채정(林采正), 원내총무 이해찬(李海瓚), 총재비서실장 김옥두(金玉斗)'였다. 이 고문은 '이해찬 총무'를 지적하며 "교육부장관 시절의 정책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지금 원내사령탑을 맡기는 무리"라고 말했다. DJ는 이 고문의 의견을 받아들여 박상천(朴相千) 의원을 총무로 하기로 했다.

이 시각 자민련 명예총재(JP) 비서실장인 이동복(李東馥) 의원은 총리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JP는 미리 와 있던 이건개(李健介) 의원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이 의원을 먼저 만났다.

JP는 "내각제 개헌이 어렵다. 추진했다가는 공동정권도 깨지고 나라도 망하겠다. 잘못되면 내가 책임을 다 뒤집어 쓰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대통령이 나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내각제 추진한다고 왜 나라가 망합니까"라고 반문했다.

한참 논쟁을 벌인 후 JP는 "당에 가서 내 얘기라고 하지 말고 이 의원 생각이라고 하면서 내각제 유보를 꺼내 보시오"라고 권했다. 이 의원은 "제가 얘기한다고 분위기가 잡히겠습니까. 김용환(金龍煥) 수석부총재에 전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JP는 "잘 얘기하시오"라고 당부했다. JP는 자리에 일어서는 이 의원에게 "이만섭씨가 총재 대행이 됐으니 얘기가 잘 될 것이다. 내각제가 유보되면 국민회의와의 연합공천 때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음미할 대목은 JP가 김 대행의 비난에 과도하게 반응했는데도 DJ가 이를 수용, 김 대행을 경질하고 곧 이어 JP가 내각제 유보의 공론화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치 사전에 각본이 짜여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金重權)씨는 "DJP 사이에 각본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서로의 심중을 읽었다고 보면 된다. 막판까지 고난도의 게임이 벌어져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JP가 연합공천을 언급했다는 점도 의미 있었다. 이동복 전 의원(현 명지대 객원교수)은 "합당은 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로 들렸다"고 해석했다.

이날 오후 이 의원은 김용환 부총재의 의원회관 사무실로 가서 JP에 들은 얘기를 전했다. 김 부총재는 "그 동안 2주째 면담 신청을 해도 만나주지 않더니 이러려고 그랬구먼"이라며 격하게 화를 냈다. 김 부총재는 강창희(姜昌熙) 총무에게 연락을 해 사정 얘기를 하고 "JP에게 함께 가자"고 말했다. 김 부총재와 강 총무는 신문로 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한 후 오후 9시가 다 돼서 총리 공관으로 갔다.

JP는 이 의원에 한 얘기를 다시 했고 김 부총재와 강 총무는 거세게 항의했다. 고성이 오고 갔다. 강 총무는 "이런 사태가 온 데는 총리 책임이 큽니다"라며 책상을 쳤다. 김 부총재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강 총무를 데리고 공관을 나왔다.

밤 11시 이 의원 집으로 JP가 전화를 했다. "도대체 김용환에게 뭐라고 했길래 난리를 치게 만드냐"는 화난 음성이 들렸다. 이동복 전 의원의 분석. "JP는 이런저런 논란을 거쳐 자연스럽게 결론이 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김 부총재의 반발이 예상외로 거세자 JP가 당황했던 것이다."

다음날(13일)부터 자민련은 들끓기 시작했다. JP는 내부 반발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 기자간담회를 갖고 "8월말까지 내각제 문제를 결론짓겠다"고 밝혔다. 당시 기자들은 내각제 논란이 유보로 정리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JP의 '8월말 내각제 결론' 언급을 그다지 주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14일 한 언론에 '김 총리가 연내 개헌 포기를 밝혔다'는 기사가 나가고 총리 공관의 설전까지 상세히 보도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JP는 다시 기자회견을 자청, "내각제 포기를 얘기한 적이 없다. 시한이 됐으니 협상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했을 뿐"이라고 진화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다. 16일 김용환 부총재는 모든 당직을 사퇴했고 다른 당직자들도 잇달아 사퇴 의사를 피력했다.

이 혼돈의 와중에서 DJ와 JP는 비밀리에 만난다. 제헌절(17일)부터 2박3일간 워커힐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DJ는 18일 JP 부부를 초청, 오찬을 함께 했다. 이 회동은 이틀 후인 20일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또 한번 자민련을 들쑤신다.

중앙일보는 'DJP, 17일 청와대서 비밀 회동, 합당과 정계개편 합의'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는 다소 부정확했다. 회동 날짜가 17일이 아니고 18일이었고 장소도 청와대가 아닌 워커힐 호텔이었다. 그러나 내각제와 합당 문제로 뒤숭숭한 상황에서 회동 사실만으로도 그 폭발력은 가공할 만했다. 내각제 강경파들은 "JP가 우리를 속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여기에다 박태준(朴泰俊) 총재가 한술 더 떠 "8월 중에 2+?가 아닌 0+무한대의 정계개편이 이루어질 것"이라며 "밑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총재가 언급한 '2+?'는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합당하고 여기에 한나라당 시민단체 재야인사까지 합세한다는 개념이었다. 당연히 자민련은 벌집 쑤신 형국이 됐다. JP는 코너로 몰리고 있었다.

이 때 JP가 선택한 수는 분노였다.

JP는 이날 낮 1시 세종로 정부청사 2층 식당에서 김용채(金鎔采) 비서실장과 함께 식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때 이덕주(李德周) 총리 공보수석이 급히 탔다. 손에는 박 총재의 언급이 보도된 연합뉴스 속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이 수석의 보고를 들은 JP는 뉴스 복사본을 뺏다시피 해 찬찬히 들여다보고 "이제 그만 둬야 하겠어" "정말 못해 먹겠어"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JP는 그냥 삼청동 공관으로 퇴근했다.

김 실장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 공관으로 달려갔다. JP는 김 실장에게 "내일 9시에 사퇴 기자회견을 갖는다고 기자들에게 알리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박 총재 의중을 물어보고 판단을 해도 늦지 않다"고 만류했으나, JP는 "그런 소리 그만 하라"고 화를 내고 이 수석을 불러 기자회견 준비를 지시했다.

김 실장은 다급한 심정에 박 총재에 전화를 걸어 "총재 때문에 JP가 그만 둔다고 한다. 사퇴를 말려 주시라"고 부탁했다. 박 총재는 내심 워커힐 회동을 알려주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당직자들과 함께 총리 공관으로 갔다. 박 총재 등은 오후 6시부터 기다렸으나 JP는 좀처럼 나오지 않다가 5시간 후인 11시께 모습을 드러냈다. 설전이 오갔다.

그 때 JP가 분노를 터뜨리며 한 얘기는 '내각제 유보, 합당 불가'였다. "워커힐 회동에서 대통령에게 내각제 발의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안 되는 줄 알면서 발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발의했다가 좌초하면 국정을 이끌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공동정권을 깨면 나라가 망하는데, 차선(내각제 유보)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합당은 처음부터 얘기한 적이 없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박 총재는 늦은 밤 김중권 실장에 전화를 걸어 "아무래도 내일 아침 대통령을 만나야 하겠다"고 부탁했다. 김 실장은 새벽 2시쯤 잠을 자는 DJ를 깨워 DJ·JP·박 총재의 3자 조찬회동을 건의하고 허락을 얻어냈다. 이 조찬 회동에서 DJ와 JP는 내각제 유보와 합당 합의 부인 등 4개항을 합의하고 이를 발표한다. 내각제는 이렇게 물 건너갔다.

그러나 JP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합당론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궁금한 대목은 워커힐 회동에서 합당 합의가 있었느냐 이다. 김중권씨는 "당시 회동 후 대통령은 '합당 얘기가 잘 됐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김용채, 이동복 전 의원은 "JP의 선문답을 잘못 읽은 것"이라며 "JP는 3당 합당 때 좌절했던 경험이 있어 그런 선택을 했을 리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김중권씨는 "다 밝힐 수는 없지만, JP가 합당에 합의했지만 당내 반발이 워낙 거셌고 이를 제어할 힘이 없어 포기했던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이처럼 청와대는 합당에 미련을 갖고 있었고 JP의 속마음이 합당 쪽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연말에 다시 한번 합당을 시도한다.

/이영성 기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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