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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필화사건 유명해도 정작 시를 본 사람이 없어서…"/이산하 "한라산" 단행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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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필화사건 유명해도 정작 시를 본 사람이 없어서…"/이산하 "한라산" 단행본 출간

입력
2003.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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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거 내 모가지 걸고 쓴 거요." 시인 이산하(43·본명 이상백·사진)씨가 그 시를 발표한 때는 1987년 3월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직후였다. 사회과학 무크 '녹두서평' 창간호에 실린 그의 장편 연작시 제1부 '한라산'은 미완의 작품이 됐다.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됐던 제주 4·3사건을 '미 제국주의에 맞선 인민들의 무장투쟁'으로 규정하고 시로 분노를 폭발시킨 이 사건은 '한라산 필화사건'으로 기억됐다.그 '한라산'이 16년 만에야 단행본 시집(시학사 발행)으로 묶여 나왔다. "'한라산 필화사건'은 유명했지만 정작 시를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다. 최근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정부 차원에서 공식 인정하면서 4·3의 진상규명 작업이 본격화하리라는 기대에 출간을 결심하게 됐다." 이씨의 말이다.

'한라산'은 그가 계획한 '민족해방 서사시 4부작'의 첫번째 작품이었다. 그에게 역사의 비극을 품은 제주도는 '혓바닥을 깨물 통곡 없이는 갈 수 없는 땅'이었으며, 한라산은 '발가락을 자를 분노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이 땅은 아메리카의 한 주(州)/ 그들의 병영에서 짐승처럼/ 사육되어 왔던 수많은 날들/ 그 수많은 신음의 밤들을/ 누가 잊을 것인가? 누가 잊으라고 하는가!'라고 외친 이 시는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몰고 왔다. 무크 필자들은 대부분 수배됐고 동료들이 끌려가 고문당했다. 이씨는 "남한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 사회로 규정하고 무장 폭동을 민족해방을 위한 도민항쟁으로 미화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4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인 88년 노태우정권 출범 특사로 풀려나왔다.

"작품에 거친 부분이 많다. '한라산'의 창작 배경은 운동적 방식의 일환이었다. 시의 미학적 측면이 희생되더라도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대였다"고 이산하씨는 돌아본다. 그는 "미완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긴 하지만 언젠가 작품을 완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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