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새로운 한일관계와 미디어'의 역할을 점검해보는 한일 여기자 세미나가 한국여기자클럽(회장 임영숙) 주최, 한국언론재단 후원으로 12∼15일 일본의 역사도시 교토에서 열렸다. 13일 오전 리가로열호텔에서 열린 주제발표와 토론회에서 이종원(50) 일본 릿교대 법학부 교수(국제정치)는 '일한(日韓)에 대해 생각한다'는 주제로 일본과 한국이 서로의 사회 문화 정치에 영향을 주며 발전해온 과정을 분석했다. 이 교수는 불과 5년 사이에 일본은 북한에 대한 정보가 줄어들고 대 북한관도 경직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북한을 본모습에 가깝게 알고 북한관도 다양해졌다며 개방정신과 자신감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공동발표자인 미즈노 나오키(53)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한국사)는 '일한 역사인식문제와 미디어'라는 주제를 두고, "일본 교과서 파동이 1982년과 2001년에 똑같이 벌어졌지만 미디어의 보도는 한결 성숙해졌다"고 지적하고 민간차원의 교류가 지속되며 변화가 온만큼 대화도 필요없다는 일본 극우파들의 태도는 깊이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 주의 문화포커스는 사회의 성숙도를 일컫는, 그런 문화를 다룬다.
● 이종원 릿교대 교수
이종원 교수는 한국과 일본이 최근 들어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세 가지 점에서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첫째 북한을 어떻게 다룰까. 한국은 김대중 정부 이래 대북온건론이 대세인 반면 일본은 1998년 대포동 미사일 오발사건과 2002년 김정일 총서기의 일본인 납치 고백으로 북한을 적대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둘째 중국 동아시아를 어떻게 대처할까. 한국은 중국과 동아시아를 중시하는 반면 일본은 중국과 북한을 위협으로 느끼면서 미국과 동맹을 강화한다.
셋째 한국 일본이 급격히 민주화하면서 대중의 정치참여가 늘어났는데 이는 장기적으로는 양국관계를 가깝게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거리를 갖게 한다. 대중의 정치참여가 늘면서 포퓰리즘이 대세가 되는데 이것이 폐쇄적이고 적대적인 내셔널리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교수는 노무현을 낳은 한국과 고이즈미를 낳은 일본의 대중심리는 아주 비슷하다고 지적했다. 둘 다 탈권위주의의 산물이라는 것. 심지어 노무현씨가 대통령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고이즈미 덕분이었다고까지 분석했다. 고이즈미라는 기반없는 정치가가 총리가 된 것은 일반 당원이 참여하는 예비선거를 도입, 여론을 등에 업었기 때문인데 한국이 바로 이를 뒤따라 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일본이 최근 10년간 경제가 침체하면서 정서가 내향화한 점이다. 특히 북한 문제를 두고 한일간의 괴리가 크다. 반일(反日) 혐한(嫌韓)에서 서로를 의심하는 의일(疑日) 의한(疑韓)의 상태이다. 한국은 일본이 재침략을 할까 우려하고 있으며 일본은 한국이 같은 민족이라는 측면에서 북한을 편들까 우려한다.
1990년에는 오히려 일본의 가네마루 방북단이 북한에 손을 내밀려고 했을 때 한국정부가 반발했고 김영삼 정권도 클린턴의 대북 유화정책에 강하게 반발했으나 김대중 정부 이후 이 같은 태도는 역전되고 있다는 것. 그 결과 이 교수는 북한에 대한 정보 자체도 이제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더 다양한 시각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내셔널리즘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사람이 다수인 만큼 한국이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을 아시아적인 연대에 끌어 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 교수는 결론내렸다.
●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교수
미즈노 나오키 교수는 한국의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베트남 전쟁 부분을 기록하면서 '전쟁에 참여했다'던 과거 기술에서 벗어나 '베트남인들한테도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적은 것을 먼저 지적했다. 한국에서 이렇게 역사관이 바뀐 것은 바로 일본의 역사왜곡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를 다루는 미디어의 태도도 달라졌다. "역사 왜곡 교과서는 일본 교과서의 일부일 뿐이다. 같은 문제가 1982년에 일어났을 때 한국에서는 일본 국민 전체가 역사를 왜곡하는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2001년에는 일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며 이 것은 그동안 일본과 한국의 학자와 시민단체들이 민간차원에서 다양하게 대화하고 교류해왔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미즈노 교수는 그런 점에서 '창씨개명은 한국인이 원해서 한 일'이라는 아소 다로 일본 자민당 정조회장의 망언에서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말에 덧붙인 "상대방에게 자유롭게 발언시키면 되잖아. 우리도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라는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이 말은 '한국과 중국에는 일본을 비난하도록 내버려두라. 일본도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는 뜻이라며 한국이나 아시아와 대화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이런 자세가 망언보다도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즈노 교수는 "한국은 김대중 정부 때 냉전의식을 극복했으나 일본은 아직도 재일조선인 학교를 차별하는 등 식민지시대의 의식을 버리지 못했다"며 "현실을 직시하는데 미디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제안했다.
한편 이날 토론자로 나온 이정화 세이케이대학 법학부 교수(국제정치)는 "일본은 93, 94년 일본군위안부 사건을 계기로 젠더, 위증, 국가의 개입을 주제로 시민운동 차원에서 수십년 걸려도 만들어내기 힘든 새로운 사고의 틀이 생겨났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한일 양국의 평범한 시민들은 식민지와 과거에만 매달려 서로의 현재를 너무 모른다"고 지적하고 이 같은 괴리감을 극복하려면 현재의 생활상과 의식을 다양한 부문에서 깊이 소개하는 작업이 많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화숙 편집위원
■ 北의 일본인 납치와 日미디어 논쟁
이번 세미나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마이니찌 신문 호리야마 아키코(36) 기자의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와 미디어' 문제였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는 2002년 9월 17일 북일 정상회담에서 북한 김정일 총서기가 시인하면서 비로소 공개됐다. 작년 말부터 시작된 일본 언론의 북한내 납치 피해자 가족 취재는 미디어의 역할을 대한 논쟁거리를 만들어냈다.
호리야마 기자는 불과 13살때 납치된 후 현지서 사망, 피납 일본인 가운데 상징적 존재가 된 요코다 메구미의 딸 김혜경(15)양을 작년 11월 아사히신문 후지TV 등과 평양에서 최초로 공동인터뷰했다.
작년 10월 납치피해자 5명은 북한에 자녀들을 남기고 귀국했는데 이들을 직접 취재하는 것은 금지된 상태라 일본 언론은 북한에 남겨진 가족을 통해 간접 취재를 시도했다. 그 최초가 김 양 보도이다. 호리야마 기자는 "이를 두고 '미성년자에게 부모의 납치문제를 묻는 질문은 가혹하고 인권침해'라는 소리가 많은 가운데 취재 자체를 비난하는 소리도 나왔다"고 일본 실정을 소개했다. '국민에게 자유로운 발언권이 없는 북한에서 취재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북한 당국에 이용돼 일본의 국익에 반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특종 3사 가운데 후지TV의 기자가 재일한국인이라는 점을 들어 '납치 문제에 재일한국인 기자가 주도권을 쥐어서는 안된다'는 인종차별론이 인터넷을 달구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인 납치는 1977년 첫 발생한 후 3년 뒤인 1980년에 산케이신문이 '아베크족 3쌍, 의문의 증발'이라는 제목으로 최초 보도했다. 그러나 이 기사도 외국의 정보기관이라고만 거명했을 뿐 북한을 언급하진 않았다. 이어 88년 칼기 폭파사건의 주범인 김현희가 일본어 교사 '이은혜'가 납치피해자였다고 증언함으로써 다시 공론화했지만 북한의 조사거부로 수사로 이어지진 못했다.
97년 2월 산케이신문과 아사히신문 주간지인 아에라가 전 북한공작원 안명진의 증언을 토대로 요코다 메구미 납치의혹을 보도했고 5월 일본 경찰당국은 '납치의혹은 7건 10인'이라고 최초로 납치의혹을 공식인정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가운데 마이니치 신문을 포함한 많은 미디어는 납치문제를 충분히 보도하지 않았다. 납치가 사실로 드러나고 심지어 8명이 사망했다는 발표가 나오자 현장기자들은 좀더 빨리 사실규명이 이뤄졌더라면 희생자가 줄지 않았을까 자책하며 납치가족에 대해 송구스러움을 느꼈다."
이 때문에 김정일 총서기의 고백과 더불어 미디어들은 25년간 보도 못한 반성으로서 과밀보도에 나선다. 납치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은 마이니치나 아사히 같은 신문은 당시 상황의 불가피성을, 납치문제를 다룬 산케이는 정당성을 강조했다.
산케이신문은 과거의 특종보도가 얼마나 옳았는가 검증하는 별책을 만들어 그동안 북한을 옹호한 정치인이나 학자를 비판했다. 요미우리 신문은 90년 이후 자사 사설과 아사히 신문사설을 비교하는 서적을 발간해 상대적으로 북한에 비판적인 것은 요미우리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호리야마 기자는 "25년간의 공백을 생각하면 일정기간 동안 반성과 검증, 반동이 일어난 것은 필요한 작업"이며 "미디어간 상호비판도 보도규제를 강제하거나 선정적이 되지 않는 한 언론계의 건전한 논의"라고 생각한다.
다만 "대북 불신감이 높아져 김정일 총서기의 사생활을 흥미위주로 보도하거나 재일동포들이 일궈온 생활기반을 위협하는 안이한 배외주의를 그대로 보도하는 현상은 우려스럽다"는 것. 그는 "일본인을 돌려보내달라고 주장하면서 북한 배는 한 척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보도태도는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북한도 변화해야 하지만 북한 문제를 다루면서 일본도 열린사회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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