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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 "대구病" 앓는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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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 "대구病" 앓는 대구

입력
2003.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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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90%만 찍었어도 1번이 됐다니까. 그러면 대구가 이 꼴은 아이다." "맞다. 경기 침체, 침체하지만 대통령 선거만 잘 됐어도 이 보다는 좀 나았을 기다."노무현 대통령의 방문이 있었던 12일, 대구 중심가의 후미진 골목 술집엔 30대 회사원들의 새된 목소리가 떠다니고 있었다. 술기운에 젖은 이들의 목소리는 작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더듬다가 급기야 지역 쪽으로 발을 뻗었다.

"전라도 사람들 뭉치는 거 한번 봐라. 하기만 하면 90% 아이가. 여는 그기 안돼." "호남에서는 이쪽을 자극 안 할라고 일부러 오전에 투표를 안 하다가 오후에 몽땅 투표를 하러 갔다고 그라데. 차∼암 똑똑하제." 혹자는 "먹먹한 막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계속되는 경기 침체에 지난해 대선, 올해 2월의 지하철 방화참사를 거치면서 침울함과 무기력에 빠진 대구를 보고 "갈데까지 갔다"고도 했다. 활력도 없고 대안도 없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모든 것이 대선 때문"이라는 원망과 "다시 정권만 잡으면…"이라는 허위의식이 메웠다. 언제부턴가 대구는 고질병을 앓고 있었다.

# 동대구로에서

동대구역을 내리면 맞닥뜨리는 시원한 10차로가 동대구로다. 도로 폭만 70m. 넓디넓은 도로 중간엔 히말라야시다 등 침엽수가 중앙분리대 구실을 하며 우람하다. 1984년 포장이 완전 마무리된 도로는 당시 '혁명적'이라는 수사가 붙었다. 개발의 상징이 '도로'였던 때였다.

"전국에 이런 도로가 어디 있었겠노. 동대구로 만들어질 때야 대구가 잘 나갔제." 한 택시기사의 말 끝이 씁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에 한번씩 내려오면 수성관광호텔에서 잤거던. 박통이 지나 가다가 '길이 안 좋다'고 한 마디 한 기라. 그러니까 당장 공사 들어가가 이래 넓게 내놓은 거 아이가." 동대구로 변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서모(51)씨의 얘기다.

그 회상은 이렇게 이어진다. "전두환이 때까지만 해도 대구가 잘나갔제. 뭐든 청와대에 전화 한 통이면 다 됐지. 대구지검에 검사들이 내려오면 놀고 간다 안캤나. 한 집 건너 청와대에 연(緣)을 걸치고 있으니 뭔 수사가 되겠노."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전모(52)씨의 얘기다.

"지금이야 끈 다 떨어졌지. 지역 빅3 건설 업체가 죽으면서 대구경제가 그 이후로 헤어나오지를 못하잖아." 식당을 운영하는 이모(42)씨는 지금의 대구 경기 침체의 원인을 결국 "정권상실"에서 찾았다. 의식의 밑바닥엔 공식이 깔려있었다. '정권상실→경기침체→분위기 침체.' 결국 모든 것은 '정권'이었다.

계명대 철학과 홍원식 교수는 "대구는 30년간 집권의식과 소중앙주의에 빠져 있다가 김영삼, 김대중 정권 아래서도 그것을 제대로 비판, 청산하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 대구의 의식은 그때 성장을 멈췄다"고 했다. 대구병의 시작이라고 했다.

# 대구의 두 D백화점에서

대구의 백화점들은 연중 세일 중이었다. 건물 외벽은 늘 사은 행사를 알리는 광고로 둘러싸였다. 대구 지역을 장악해 온 두 D백화점과 올해 초 서울에서 내려온 L백화점의 대결이 벌어지는 소리없는 전장이었다.

전국구 메이저 백화점들의 공세에도 대구의 두 D백화점만은 수십 년간을 꿋꿋하게 영지를 지켜왔다. "다른 지역은 메이저가 내려와서 자본으로 밀어붙이면 그냥 허물어졌는데 대구는 유독 예외"라고 했다. 대구지역 두 백화점이 "원래부터 탄탄해서"라는 설명도 있었지만, '특유'라는 수식이 붙는 지역 정서를 중요한 원인으로 꼽는 이들이 많았다.

"지역 경제를 살릴라 그라면 우리지역 업체에 가서 사야 한다 아이가." "경제도 어려운데 외지기업이 와서 대구 돈을 가져가니 더 어렵제." 백화점 인근에서 어렵잖게 들을 수 있는 주부들의 얘기였다. 대구 두 D백화점의 마케팅 포인트도 결국 '연고'였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도 ○○백화점을 이용했습니다." 연고의식을 자극하는 광고가 연일 TV를 탄다.

서울에서 대구로 진출한 한 기업인은 '백화점 전쟁'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고 했다. "대구 전반에 그런 정서가 깔려있고 사람들이 그걸 자랑스러워 해요. 마치 거대한 성으로 둘러싸인 봉건 시대 영지 같아요. 이런 연 저런 연으로 똘똘 뭉쳐 외지인들은 좀처럼 받아주지를 않아요. 서울에서 웃고 내려와 울고 간다는 곳이 대구에요."

#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참사 100일을 넘긴 중앙로역사 위로 차들의 통행은 재개됐지만 음울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추모공원 부지선정을 둘러싼 유족과 대구시의 양보 없는 줄다리기가 아직도 팽팽했고, 역사를 감도는 향내는 몇 달째 대구 전역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든 역사 안 지하1층은 참사현장 그대로 대낮에도 을씨년스러웠다. 순번을 정해 자리를 지킨다는 한 유족은 "대구시가 아예 죽일 테면 죽이라는 식의 배짱을 부린다"고 했다. 몇 달이 지나도록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학원강사 장경석(32)씨는 "참사 이후 대구 시민들 사이에선 잠시나마 자성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전했다. "국회의원에 시장, 도지사, 지방의회 의원들까지 모두 한나라당 일색이다 보니 비판과 견제가 사라져 결국 이런 일이 빚어졌다는 개탄이 많았다"고 했다.

중앙로역 인근에서 보석상을 운영하는 김모(43)씨는 하지만 손사래를 쳤다. "왜 그런 사람 찍었냐며 자기 손가락 잘라야겠다고 하는 이들 많이 봤어. 하지만 막상 선거가 닥치면 또 당보고 찍을 거야. 고질병이야."

# 유니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대구 수성구 대흥동 월드컵 경기장. 정적만이 감도는 국내 최대 규모 경기장 주변엔 공익요원이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만 시끄럽다. 60여 일을 남긴 2003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주경기장이지만 국제적 행사를 앞둔 설레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중앙로에서 만난 한 시민은 "U대회 U대회 하니까 '뭔가 하는가 보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U대회가 어떤 대회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유니버시아드를 재도약의 전기로 삼자'는 플래카드와 대회기가 시내 곳곳에 내걸렸지만 시민들은 무심했다.

대구대 사회학과 홍덕률 교수는 "외부를 향해 꽁꽁 문을 닫아 건 대구가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발전의 전기로 삼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활로를 찾기 위한 토론과 합리적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 중앙정부에 전화 한 통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정서가 고스란히 무력증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대구=글 이동훈 기자 dhlee@hk.co.kr

사진 이성덕기자

● 대구 소장학자들 "자성"촉구

'대구병'을 진단하고 자성을 촉구하는 대구 지역내 소장 학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수구병, 연고주의, 현실안주 등의 병세가 대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전제한다. 하지만 "이런 모순이 가장 집적된 도시"라는 데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대구대 사회학과 홍덕률 교수는 "대구의 정치권은 신진대사가 안된 채 늘 일당독재이고 견제와 균형없는 동종교배의 후진성으로 점철됐다"고 주장한다. 정치 경제 행정 언론 권력을 끼리끼리 나눠 가진 채 "토론도 활력도 존경받는 리더도 없는" 3무(無)의 도시가 됐고, 기존질서만 맹목적으로 집착하고 현실에만 안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홍 교수의 대구 자아 비판은 신랄하기까지 하다. "공(公)은 없고 사(私)만 판치고 늦은 시간 술집의 작은 방들은 꽉꽉 차지만 토론회나 공청회는 늘 썰렁한 도시, 연(緣)이 부담스러워 공익적 비판마저 말라버린 도시…." 홍 교수는 대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혁신, 지방정부 혁신, 지역언론 개혁, 지역 대학 혁신, 시민의식 혁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계명대 철학과 홍원식 교수의 진단도 비슷하다. "다양성의 부족으로 대화가 끊어진 채 닫힌 구조를 띠고 대구 스스로 배타와 고립을 불러오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다 보니 "개성도 색깔도 없는 죽은 도시로, 고립된 섬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홍 교수는 "대구병은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언론 종교 문화 교육 등 전반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며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병이 든 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대구의 대다수는 이 같은 병의 존재마저 외면한다고 했다. 투박한 억양으로 "대구가 뭐 어때서?"라고 항변한다고 홍 교수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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