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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정주영과 김대중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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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정주영과 김대중의 꿈

입력
2003.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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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간척사업 예찬론자였다. 요즘 뜨거운 이슈인 새만금사업 논란도 그의 견지에서 보면 어림반푼어치 없는 소리다. 그는 좁은 땅덩어리에서 숙명처럼 배고픔을 겪어온 우리에게 한 뼘의 땅이라도 늘리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흐릴 수 없는 지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다.정주영은 기상천외한 폐유조선 물막이 공법으로 국내외에 화제를 뿌렸던 천수만 간척공사로 1만6,000헥타르의 국토를 늘렸다. 시화지구 간척사업도 그의 건의로 시작됐다. 그는 태안반도에서 고군산열도를 잇는 광대한 바다를 메우는 것을 포함, 서남해안의 수많은 갯벌을 간척해 남한 면적의 반에 해당 하는 땅을 늘리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간척사업에 발벗고 나섰던 것은 국토 확장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후반 해외건설 특수가 퇴조하던 시기 해외건설에 투입됐던 엄청난 장비와 유휴 인력을 소화할 대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어민 피해보상, 환경보존의식의 확산 등으로 더 이상 대규모 간척은 힘들어졌다. 이 때 정주영의 번뜩이는 생각은 북한의 SOC투자에 미쳤다. 때 마침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로 남북관계 개선도 가시권에 있었다. 그는 1989년 처음으로 방북, 북한의 대규모 SOC건설 참여와 관광사업의 꿈을 키운다. 하지만 취임사에서 피는 동맹보다 진하다고 했던 김영삼 정권에서는 정작 꿈을 펼치지 못했다. 92년 대선출마 후유증으로 YS와 척이 진 데다 냉온탕을 되풀이한 문민정부의 대북정책 하에서는 도무지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권의 출범과 함께 정주영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98년 6월16일 정주영은 500마리의 소떼와 함께 판문점 통해 북한에 들어가는 장관을 연출했다.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인 기소르망은 이를 '20세기 마지막 전위예술'이라고 평했다.

그의 대북사업 집착을 북녘이 고향인 노 기업인의 향수나 남북화해협력에 대한 열망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건설경기 퇴조와 방만한 경영 등으로 위기에 처한 현대그룹의 돌파구를 대북사업에서 찾으려는 사업가적 비전이 더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정주영의 원대한 대북사업구상이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남북교류협력이 진척되어야 함은 물론, 북한의 지불능력 확보차원에서 100억 달러에 달한다는 일본의 식민지 보상자금, 그리고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가 필요했다. 그 전제는 북한의 대일·대미 수교였으며 이 일련의 과정은 DJ의 햇볕정책구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남북정상회담일 수밖에 없었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현대가 먼저 했다고 한 것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6·15남북정상회담이라는 한편의 드라마에서 DJ가 감독 또는 주연을 맡았다면 정주영은 엄청난 제작비를 댄 제작자였다. 현대의 대북송금을 단순히 6·15 정상회담에 대한 정권차원의 대가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6·15 정상회담 후 대박을 꿈꾸었던 정주영은 병든 노구를 이끌고 휴전선을 넘나들며 대북사업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큰 진척을 보지 못하고 2001년 3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금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싸고 국제적으로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대북송금사건 특검으로 정주영과 김대중이 함께 꾸었던 꿈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문제는 그로 인해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안위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계 성 국제부장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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