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날개가 생기면 어미의 둥지를 떠나 창공을 날아야만 하듯, 사람의 아들도 성숙하면 부모의 품을 떠나 냉혹한 경쟁 사회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만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 분야라고 예외일 수 없다. 국사학자인 이기백 교수가 "한국의 전통문화도 닫힌 공간이 아닌 열려진 국제교류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는 스크린쿼터 해제에 대한 논란의 해법도 위에서 언급한 변증법적인 자연법칙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동차 산업 못지 않은 규모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산업이 한·미투자협정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것의 국제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스크린쿼터라는 보호막을 벗고 광야로 나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모험은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주지만, 인큐베이터와 같은 보호막 속에 안주하는 것은 대원군 시대처럼 퇴행적인 침체의 늪 속에 빠져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
필자는 4년 전 국내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스크린쿼터 제도를 옹호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급속히 변화한 시대적인 흐름과 최근 한국영화의 급격한 질적, 양적 성장은 그때의 염려가 기우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필자는 스크린쿼터의 빗장이 풀리면 강대국인 미국의 거대한 산업자본주의가 밀려와서, 한국의 영화산업을 빈사상태로 황폐화시킬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언젠가는 스크린쿼터가 해제될 것이라는 당시의 위기의식이 오히려 우리 영화의 자생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 영화가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은 스크린쿼터 제도보다는 영화제작자와 감독들이 국내의 닫힌 공간에만 안주하지 않고 열린 국제무대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물론 포스트모던 다문화 시대에 스크린쿼터라는 보호막을 통해 소수민족 문화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성숙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개방 속에서의 경쟁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그동안 우리 영화가 이룩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스크린쿼터를 해제하고 당당히 경쟁에 나서는 것이 진정한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한 보다 현명한 정책이 아닐까. 원형적인 시각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국제시장의 충격을 흡수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력을 갖도록 냉혹한 현실과 부딪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화산업이 계속해서 스크린쿼터에만 의존해서 긴장감을 잃게 되면,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가 나오기 전처럼 진부하고 상상력이 빈곤한 영화를 만들어 스스로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할 위험성도 없지 않다. 프랑스가 스크린쿼터를 이용해서 자국 영화를 보호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프랑스 영화의 국제적 경쟁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산업은 종합예술에 속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있어서 그것이 차지하는 경제적 가치와 규모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우리 영화인들도 언제까지나 그것을 보호무역의 울타리 속에 방치할 수만은 없다는 영화 외적인 현실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과 같이 유기적인 사회에서 어느 한 부분의 극심한 경기침체는 곧바로 영화산업에 치명적인 파급효과를 끼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의 예술작품도 진화론적인 법칙을 실천하는 변화의 물결을 외면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 영화계도 과거 오랜 시간동안 배양한 예술적 경쟁력과 관객의 사랑으로 스스로 비교우위에 서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해 본다. "자신에 대한 비판은 엄격하게 하되, 다른 사람에 대한 책망은 관대하게 하라"는 공자의 말씀은 우리 영화산업의 국제화 과정에도 필요한 것 같다.
이 태 동 서강대 교수· 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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