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을 맴돌던 휠라 본사 매각 작업은 미국계 펀드 서버러스가 인수 작업에 뛰어들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서버러스는 휠라 USA 존 엡스틴 사장과 내가 함께 끌어들인 미국계 투자전문 펀드다.서버러스는 협상 자세부터 달랐다. 협상이 시작되자마자 휠라 지주회사 HDP가 휠라의 부채를 떠안는 대신 나머지 자산에 대해서만 가치를 환산해 인수하겠다며 구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안을 들고 나온 것이다.
더 이상 매각 작업을 미룰 수 없었던 HDP도 적극적으로 나왔고 곧바로 협상이 시작됐다. 6개월 이상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가 계속되다 지난해 11월 말 3억5,100만 달러(약 4,300억원)로 인수 대금에 대한 의견이 좁혀졌다.
가장 중요한 걸림돌인 인수 대금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만큼 협상은 절반 이상 성공한 셈. 서버러스는 휠라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제3자와 협상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오히려 협상파기에 대한 보증금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굴욕적인 조건이었지만, 매각 작업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HDP로서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서버러스는 두 달이 넘도록 꼼꼼하게 휠라 본사에 대한 자산 실사를 실시했다.
3월7일 서버러스가 새로 설립한 지주회사 SBI(Sports Brand International)와 HDP가 마침내 인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인수 금액은 당초 합의대로 3억5,100만 달러로 최종 결정됐다.
SBI는 세계 시장을 미국, 유럽, 아시아 등 3개 지역으로 나눠 별도의 회사를 설립, 휠라를 운영하기로 했다. 글로벌 회장은 휠라 USA 사장을 지냈던 존 엡스틴이 맡고 나는 아시아 지사 회장을 맡기로 했다. 매출 실적이 가장 저조해 운영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휠라 유럽 사장에는 서버러스측이 내세운 인물인 밥 갤빈이 임명됐고 휠라 USA는 부사장이었던 톰 오리오단이 사장으로 일하기로 했다.
휠라 본사도 이탈리아 비엘라에서 뉴욕으로 옮겨간다.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로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자부심을 줬던 휠라는 더 이상 이탈리아 브랜드가 아닌 것이다.
내가 맡을 휠라 아시아 본부는 일본, 홍콩, 중국 등 15개국 17개 지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비록 휠라 코리아가 지역본부를 맡았다고는 해도 사실상 기능은 홍콩에서 담당할 것 같다.
일각에서는 지사인 휠라 코리아가 본사를 인수했다는 점에서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고 표현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투자 펀드 서버러스와 휠라 USA, 그리고 휠라 코리아 3자가 참여하는 공동인수다.
특이한 것은 이번 인수가 한국에서 유례가 없는 MBO(Management Buy Out·경영자인수)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즉 투자 펀드가 자금만 대고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는 대신 일부 지분을 인수한 기존 경영진이 계속 경영을 하는 것이다.
인수 이후 복잡한 상황을 고려해 SBI는 개인회사로 출범했지만, 3∼5년 후에는 뉴욕 증시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서버러스는 이 기간 동안 휠라의 경영을 휠라 코리아와 휠라 USA 경영진에게 위임하고 배당만 가져간다.
휠라가 주식시장에 상장되면 서버러스는 지분을 팔고 휠라를 떠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휠라는 소수의 대주주가 경영권을 행사하는 주식회사 체제가 될 것이다.
'한국 최고 연봉의 샐러리맨'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이번에도 연봉에 대해 묻는 사람이 많다. 상한선 없이 200만 달러 정도가 될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휠라 본사의 지분을 갖게 된 내게 연봉의 많고 적음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이번 인수를 통해 인수자금을 댄 서버러스를 제외하고는 존 엡스틴과 나는 휠라의 최대 주주가 됐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두 사람 모두 5% 안팎의 주식을 할당 받았다. 5년 후 상장이 될 때 5%의 주식이 어떤 가치를 지닐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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