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와 까다로운 통관절차 등 기존의 무역장벽 대신 각국 공정거래위원회의 경쟁정책이 외국 기업을 견제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13일 공정거래위원회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1996년 이후 미국이나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이 현지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에 공정거래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부과한 벌금 총액이 1,400억원에 육박하고 있다. 미국 공정위의 경우 2001년 제일제당과 대상의 일본 현지법인인 대상저팬에 핵산조미료 가격담합을 이유로 각각 300만달러와 9만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한국 기업에 총 464만달러(55억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또 EU 경쟁당국은 지난해 12월 제일제당과 대상에 각각 1,554만유로와 274만유로의 벌금을 부과하는 등 국내 5개 대기업으로부터 총 9,200만유로(1,288억원)를 거둬갔다.업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에 거액의 벌금을 매긴 해당 경쟁당국은 공정한 경쟁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내걸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으로 경쟁력이 약화한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GM의 대우자동차 인수, 현대상선의 자동차 운반선 사업부문 매각 등 국내 기업이 사활을 걸고 추진한 대규모 사업매각도 미국이나 EU 경쟁당국이 승인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시장질서 유지를 이유로 상대 국가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사례는 미국이나 EU 경쟁당국 사이에서는 이미 보편화했다. 특히 기업 경쟁력에서 미국에 밀리는 EU 경쟁당국에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다. EU 경쟁당국은 미국 제너럴일레트릭(GE)이 450억달러를 들여 야심차게 추진했던 하니웰사의 인수를 불허했으며, 최근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컴퓨터 운영체계 독점행위에 대해 미국보다 훨씬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이고 있다. 또 미국 MCI 월드컴과 스프린트의 합병을 불허한데다 AOL 타임워너의 유럽내 사업을 허용하면서 까다로운 조건을 부과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우리나라 공정위도 발 빠른 대응에 나서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한국 공정위는 그동안 국내 기업의 인수·합병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았으나, 7월부터는 한국 시장의 경쟁구도에 영향을 미치는 다국적 기업의 인수·합병에 대해서도 심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는 "공정위가 최근 한국MS의 윈도XP와 메신저 끼워팔기에 대해 예상보다 강도 높게 대응하는 것도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쟁당국의 역할변화와 관계가 깊다"고 말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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