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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 그레고리 펙 타계/"만인의 로마신사" 삶의 막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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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 그레고리 펙 타계/"만인의 로마신사" 삶의 막 내리다

입력
2003.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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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려온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이 11일 밤(현지시간) LA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부인 베로니크 파사니씨는 "두 손을 모으고, 나를 바라보더니 마치 잠드는 것처럼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다"고 말했다.향년 87세.

그레고리 펙은 189㎝의 훤칠한 키, 조각 같은 얼굴선, 벨벳처럼 부드러운 음성으로 주로 정의를 수호하는 변호사, 기자 역 등을 맡아 '미국인의 지도자 이미지의 전형'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그는 신인 여배우인 오드리 헵번과 호흡을 맞춘 영화 '로마의 휴일(1953·감독 윌리엄 와일러)에서 신문기자 조 브래들리 역을 맡아 전세계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고, 이후 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해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일궜다. 93년 타계한 오드리 헵번은 그를 일컬어 "위대한 남자의 단순함, 단순한 남자의 위대함을 보여준 배우"라며 "우리시대의 진정한 남자"라고 평가했다.

'로마의 휴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지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앵무새 죽이기'(1962, 국내에는 '알라바마 이야기'로 소개). 그가 연기한 애티커스 핀치는 남부 출신의 변호사로 성폭행 누명을 쓴 흑인을 도우는데 최근 미영화학회(AFI)가 '영화 100년간 최고의 영웅'으로 뽑았다.

1916년 미 캘리포니아주 라 호야에서 태어난 그는 약국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이혼, 다섯 살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주말마다 할머니 손을 잡고 극장에 가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UC 버클리대 의대에 진학했으나 곧 연기로 방향을 전환, 39년 뉴욕으로 건너가 42년 브로드웨이 연극 '모닝 스타'로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세계적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에게 무용을 배우던 중 심하게 다친 그는 무대를 향한 꿈을 포기하는 대신 영화로 방향을 틀었다. 44년 '영광의 나날'로 은막에 데뷔한 후 곧바로 '천국의 열쇠'로 스타덤에 오른 그는 '연정' '신사협정' '12시 정각' 등에 출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5차례나 올랐고 '앵무새 죽이기'로 수상했다. 골든 글로브도 8차례나 후보에 올라 5차례 를 수상하는 등 상복도 적지않았다. '백주의 결투' '나바론' '백경' '케이프 피어' '맥아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 전세계 팬을 사로 잡았다.

정치적으로 진보주의자였던 그는 미 암협회(American cancer society) 회장을 지낸 공로로 69년 린든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의 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받기도 했다.

비교적 깨끗한 사생활은 그의 이미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였다. 42년 결혼한 그레타 라이스와는 55년 헤어졌지만 곧 프랑스 여기자 베로니크 파사니와 결혼한 후 4남매를 낳아 금슬을 과시했다.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할리우드를 일군 마지막 영웅이 사라졌다"며 아쉬워하고 있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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