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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8>동백림사건(下)-홍보용 재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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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 - 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8>동백림사건(下)-홍보용 재판 공개

입력
2003.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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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헤어진 뒤 15년 만에 이북에 있는 남편의 소식을 들었으나 이것을 당국에 알리지 않은 행위를 처벌해야 하는 것이 조국의 현실이다."1967년 12월 6일 결심공판에서 서울지검 공안부 이종원(李鍾元) 부장검사의 논고 내용 중 일부다. 이 부장검사는 이러한 '현실'을 바탕으로 평양을 방문했거나 난수표를 소지했던 피고인 6명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당시 현실은 68년 1월 21일 이른바 '김신조 사건'을 전후로 북한의 무장간첩(공비)과 무장간첩선의 출몰이 잦았다. 이러한 북의 대남공작은 69년 2월 위장간첩 이수근(李穗根) 사건으로 피크를 맞는다. 당국은 이례적으로 69년 3월 31일까지 이어진 동백림 사건의 수사 및 재판 과정을 구체적으로 공개했으며, 4·19 재판 이후 처음으로 법정에 마이크까지 설치해 주었다. 현실 문제를 실정법의 프리즘을 통해 정치·사회적으로 최대한 활용한 사건이었다.

검찰신문과 답변(발췌)

<피고인a> 동백림에 왜 갔나? 공작원 임모가 여비를 대준다며 구경가자고 했다/북에 사는 누나의 소식을 알려고 했는데? 그들이 이북에 사는 친지가 없느냐고 졸라 황해도에 사는 누나의 주소를 적어 주었다/노동당 입당을 위해 이력서를 써주었다는 것은? 명함이 없어 백지에 주소 성명 직장을 써 준 일이 있다/입당 선서를 했다는데? 접선방법에 대해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했다/(부인에게)남편의 행동을 알고 있었으며 함께 동백림에 갔다고 진술 했는데? 그렇게 말해야 구속도 안 시키고 남편을 위하는 귀부인이라고 해서 시인했을 뿐이다.

<피고인b> 평양에서 무엇을 했나? 평양 비행장 근처 안전가옥에 수용되어 평화통일과 한일회담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노동당에 입당했는가? 그들이 입당시켜 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귀국해서 '개성의 형이 대구에 사는 갑순이에게'라는 대남방송을 듣지 않았나? 귀국 후 2년 동안 그들에게서 흥미를 잃어 북괴방송을 듣지 않았다.

<피고인c> 지령을 받은 적이 있는가? 56년 처와 함께 평양에 가서 산업시찰을 하고 원산에서 8·15 경축식전을 참석했으며 처남도 만났다. 서독에 돌아와서 박정희 대통령 방독 때 통일방안(시가와 방법)에 대해 오찬회 석상에서 질문하라는 것과 광부 박모를 포섭하라는 지령을 수행했다/난수표를 갖고 있었는데? 사용은커녕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로 압수 당했다.

<피고인d> 밀봉교육의 내용은? 유럽 여행 중 동백림에서 공작원을 만났다. 북괴 영화('춘향전'과 '꽃피는 평양')를 보았고 한국의 농촌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공작금은? 돈은 받지 않았다. 조사를 빨리 끝내준다기에 200달러를 받았다고 했다/평양에 가겠다고 약속했다는데? 그들의 호구(虎口)를 벗어나기 위해 그랬다/귀국 후 왜 신고하지 않았나?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검찰측 논고(발췌)

사회의 상식에 속하는 것이라도 반국가단체를 유리하게 하는 것일 때는 군사기밀에 속한다. 북괴공작원도 간첩이며, 그들과의 만남은 간첩과의 접촉이다. 개인으로부터 수집한 자료를 총괄 분석해서 군사력 등을 평가할 수 있을 경우 그 개인자료도 군사기밀로 볼 수 있다는 서독의 '모자이크 이론'을 원용해야 한다. 동백림에 있는 북괴의 안전가옥은 치외법권과 불가침권을 갖고 있으므로 그곳으로 간 사실은 북괴 지배하로 탈출한 것이다. 잠입죄는 지령을 받고 귀국한다는 인식만 있으면 되며, 지령 완수 목적이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최근 북괴에 끌려갈 수 있다는 인식이 있으면서 어로저지선을 넘은 어부들에게 탈출죄가 성립한다고 판결했다.

■ 문 인 구 (文仁龜·전 대한변협 회장) 당시 변호사의 증언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졌어야 한다. 북한은 학자와 유학생들을 상대로 자신들 체제를 홍보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데 우리의 현지 대사관은 무엇을 했나. 조국으로부터 방치 당한 그들은 북에 유혹됐다. 일단 발목이 잡히면 빠져 나올 수 없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동백림 사건을 보는 나의 시각은 한결같다.

사실 나는 당시 그 사건의 변호인을 맡고 싶지 않았다. '평양 방문'과 '난수표 소지'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인해 승소할 확률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J씨의 변호를 맡으면서 그가 동백림에 있는 북한대사관을 드나들었으며, 평양을 2차례 방문했고, 난수표를 소지한 채 서울에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당시 분명히 간첩죄에 해당했다. '알만한 지식인'으로서 자의로 평양에 갔으며, 상당기간 머물렀다. 그를 구하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아무튼 솔직히 말하라. 학자로서의 체면과 자존심을 지워라. 당신이 북한에 대해 알고 느꼈던 것 가운데 한국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말하라"고 설득했다. 그는 나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오히려 그는 "그(공소장) 외에도 누구를 만났으며, 이러한 일도 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수사관들도 파악하지 못한 사실들이었다. 당시 '평양 방문'이나 '난수표 소지'는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위반으로 엮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었다. '북괴공작원과 접선하고(만나고)' '공작금(항공료 식사비 등)을 받았으며' '누구누구와 공작소(호텔이나 가정집, 혹은 북한대사관)에서 밀봉교육(대화)을 받았으며' '후배나 동료를 포섭(연락)한 것' 등은 상투적 표현으로서 일종의 기소를 위한 편집기술에 불과한 것이었다.

심지어 다른 피고인은 "나는 진짜 간첩이 되려 했고, 활동도 했다. 그런데 중정은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거나 "평양에 가서 이러저러한 지령을 적극적으로 받았으며, 서울에 와서 평양에 연락도 했다"고 말했으나 공소장에는 빠진 경우도 있었다.

유럽이라는 상황, 지식인이라는 인식, 국외에서 4·19와 5·16을 접하면서 느꼈던 뜨거움, 북한에 대한 호기심, 나아가 내가 북한을 개조시켜 보아야겠다는 혈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왕이면 북한에, 평양에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으며, 특히 북에 친지를 둔 사람은 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북한의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당시 이효순(李孝淳) 북한 노동당 대남사업총국장으로부터 "너희들이 한 일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남한에서 알면 너희들은 죽는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을 것이다. 당시는 '왜 평양에 갔느냐'보다 '결과적으로 평양에 갔다'는 사실이 간첩죄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 이 응 노 (李應魯·1904∼1989) 화백의 회고

1957년부터 파리에서 살았다. 우리집에는 유학생과 여행객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한국대사관 공사관도 종종 술을 들고 찾아오곤 했다. 67년 어느날 그 공사관이 찾아왔다. 그는 "대통령께서 해외에서 활약하면서 민족문화를 선양하고 공헌한 사람을 초대하고 싶어 한다"며 "부인과 함께 모국을 방문해 달라"고 했다. 이어 "누구는 부르고 누구는 부르지 않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으니 비밀리에 추진하기 바란다"고 했다. 고국을 떠난 지 10년이었다.

그와 함께 중간기착지인 도쿄에 도착했다. 예약된 호텔에 들어 서울 친지들에게 전화를 하려고 하니 그가 "제가 다 연락해 두었으니 선생님께서는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고 말했다. 이튿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손녀가 마중 나와 있었다. 함께 가려고 했으나 그는 "우선 호텔에 짐을 푸시지요"라며 검은 승용차에 태웠다. 한 시간쯤 지나 큰 건물에 닿았다. '중앙정보국(KCIA)'라는 푯말이 걸려 있었다. 좀 조사할 게 있다며 아내와 나를 떼어 놓았다. 혼자 남산의 지하실 방에 갇혔다.

4명의 조사관이 들어왔다. "솔직히 다 털어 놓으세요"라고 말했다. "도대체 뭘 듣고 싶은 겁니까"라고 했더니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보여 주었다. "한번 맞았다가는 목숨 건지기도 힘들어요. 여긴 파리가 아니에요. 노인네라고 봐주는 거 아닙니다"고 말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말투를 바꾸며 "당신 평양에 갔지"라고 했다. 간 적이 없다고 하자 "안 되겠군, 맞아야 털어놓겠군"이라며 몽둥이를 바닥에 땅땅 두드렸다. 동베를린엔 왜 갔느냐, 공작금은 얼마를 받아 누구에게 줬느냐, 5만달러냐 10만달러냐 등등, 다음날 새벽2시까지 계속됐다. 나중에는 "아이고 선생님, 제발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하며 비위를 맞추기도 했다. 아내도 마찬가지 대우를 받았다.

파리에는 지금의 아내와 함께 왔다. 전처(2001년 사망)의 자식(양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당시 28세) 때 인민군에 끌려갔다. 파리에 온지 몇 년 뒤 친구의 친구가 평양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내 자식놈을 만났다고 했다. 죽은 줄 알았던 그 애한테서 편지를 받아 왔더라. 북에서 결혼해 잘 지낸다는 내용이었다. 답장을 보냈더니 얼마 뒤에 사진을 보내 왔다. 그 무렵 예전에 독일서 통역을 하던 남자(북한 공작원)가 찾아왔다. 그는 동베를린에 갔다가 우연히 북한대사관 사람을 만났다며 동베를린에 오면 아들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당시 서독의 한국 유학생은 여름 휴가철이면 종종 동베를린에 가곤 했다. 서베를린에서 15분 정도 기차를 타면 간단히 건너갈 수 있었다. 자식을 만나러 동베를린에 갔으나 만날 수 없었다. 반년쯤 후 다시 편지가 전해졌다. 또 갔지만 역시 만나지 못했다. "차라리 평양으로 찾아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듣고 솔깃했으나 전람회 일정 때문에 포기했다. 윤이상씨도 북에서 음악을 하는 옛 친구를 만나러 평양에 갔다. 이런 일들이 동백림 사건으로 날조되었다.

69년 특별사면으로 석방돼 파리로 돌아왔다. 유학생과 여행객이 우리 집에 와서 술과 불고기를 놓고 떠드는 일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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