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옥탑방에 산다. 수난의 계절 여름만 아니면 그럭저럭 살 만한 곳이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옥상도 넓고 바람이 잘 든다. 전망도 좋아 빨래를 마치고 의자에 앉아 서울 시내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곳이다.작년 봄, 나만의 공간이었던 이곳에 고양이들이 나타났다. 혼자 사는 이곳을 찾아준 귀여운 손님들이 반가웠다. 친한 척도 해보고 가끔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살만한 곳이라 여겼던 모양인지 고양이들은 나의 옥상을 보금자리로 삼았다. 처음 세 마리였던 고양이들은 여름 무렵 새끼까지 낳아 일곱 마리 대가족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염치없는 녀석들이었다. 얹혀 사는 주제에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옥상을 제 집인 양 마음대로 드나들며 구해온 먹이를 먹고, 뛰어 놀았다. 뒷정리는 늘 나의 몫이었다. 게다가 쓰레기봉투를 찢어 흩어놓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를 땐 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기척을 느껴 부엌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고양이 두 마리가 식탁 위에 올라가 열심히 밥을 훔쳐 먹고 있었다.
화가 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후 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옥상 밖으로 내쫓았다. 첫 눈을 기다릴 즈음이 되자 고양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사라졌다. 근처 어디로 보금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다시 나만의 평안이 돌아왔다.
혼자만의 평안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난 봄 옥상 한 켠에서 나른한 햇살을 즐기며 단잠에 빠진 낯선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쫓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놔두기로 했다. 저 고양이를 내쫓더라도 또 다른 고양이가 빈자리를 채울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녀석들에게 인간이 세운 사유재산의 경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설령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어 사유재산의 정당성을 설명해준다 하더라도 소용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생존과 번식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고 있을 뿐일 테니.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법은 준엄한 것이지만 가장 원초적인 살아갈 권리를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에 근거했다는 공문 한 장에 사람을 이리저리 내모는 우리 모습이 오히려 야만이 아닐까? 단 한 뼘의 자리조차 허락 받지 못해 음습한 서울의 지하공간 어딘가에 몸을 누일 노숙자들과 철거민들에게 사랑과 연대의 인사를…. 나와 고양이의 부탁이다.
노 현 석 고려대 컴퓨터교육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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