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 귀족들이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먹기 위해 이미 먹은 것을 일부러 토해내면서까지 끊임없이 먹었다고 전해지는 식도락(食道樂)! 사전적인 의미로는 여러 가지 음식을 먹어 보는 일을 '도락'으로 삼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의 식도락은 더 이상 그런 호사스러움이나 사치스런 즐거움을 뜻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식도락이나 미식가라면 으레 돈많고 여유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맛과 멋이나 건강에 관심이 있다면, 작은 마음의 여유와 문화를 맛보려는 의지만 갖고 있다면 누구나 식도락가가 될 수 있다.사람들은 이제 '맛과 멋'에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하고 돈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먼 곳이라도 찾아가고 평가한다. 부자들만 멋있는 곳을 찾아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은 괜한 질투심의 표현이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식사시간은 단순히 끼니를 해결하고 배를 채우는 시간이라기보다 '한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반영하는 생활의 한 부분'이다.
맛의 첨병, 식도락
레스토랑 가이드 사이트인 쿠캔네트(www.cookand.net) 회원들은 정례적으로 '맛기행' 모임을 갖는다. 맛을 찾는 여행이란 이름 그대로 시내나 전국, 외국의 맛있는 음식점들을 찾아 나서는 만남이다.
최근 이들 회원 20여명은 이태원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들을 방문했다. 신설 레스토랑들이 어떤 맛을 선보이는지 알고 싶어서다. 게코스가든, 하오츠 등 레스토랑 4곳을 찾아 다닌 이들은 많게는 10가지, 적게는 2가지의 음식을 각각 맛봤다. 모임에는 푸드스타일리스트 같은 음식 전문가가 동행한다. 식문화 컨설턴트 강지영씨는 이날 갖가지 음식에 내포된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 예절과 배경지식을 들려 줬다. 설명 후에야 식사가 시작되는 것은 상식. 공부하면서 먹는 셈이다. 행사를 기획한 쿠켄네트의 서원예씨는 "하루에 8군데의 레스토랑을 다닌 적도 있다"며 "조금씩 다양하게 먹어 보기 위해 밥과 빵은 절대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와인나라의 와인앤다인(www.winenara.com)은 음식과 와인을 주제로 한 미식가 모임이다. 회원 30여명은 매달 한 번씩 맛있는 레스토랑을 찾아가 다양한 와인을 함께 즐긴다. 김혜주 팀장은 "레스토랑을 매우 신중히 선정한다"며 "음식뿐 아니라 와인이 추가되기 때문에 반응이 더 좋다"고 얘기한다. 회원 신두철(43·한국캘러웨이골프 이사)씨는 "선정된 레스토랑에 가서 맛에 실패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며 "음식 맛과 와인에 대한여행을 하는 기분"이라고 설명했다. 음식을 주제로 한 모임은 인터넷에서도 활발하다. 쿠캔네트의 식동호회, 요리표현, 레스토랑 전문 사이트 잇앤쿡(eatncool.com)의 식도락기행, 천리안, 네이트 등. 일반 친목 모임까지 치면 셀 수 없을 정도다.
식도락에는 국경(?)이 없다.
지난해 싱가포르로 맛기행을 다녀온 치과의사 석창인(42·수원S& U치과)씨는 식도락 모임 '미인촌'의 골수 회원으로 활동한다. 밤업소 이름 같지만 미인촌은 한자로 맛을 끌어들인다는 의미의 '味引村'이다. 20∼40대까지 연령층과 직업은 다양하다.
같이 여행갔던 30여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이 모임은 매년 주제를 정하는데 올해 주제는 '제철 음식 제대로 먹기'이다. 최근에는 봄나물을 맛 보러 오대산 여행을 다녀왔다. "회원들은 거의 경지에 오른수준입니다. 음식을 평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석씨는 "정례 월모임 외에 일주일에 한두번씩 번개모임을 가질 만큼 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자랑한다. 맛을 찾아 지방까지 다니는 미식가들의 노력도 만만치 않다. 승우여행사가 매주 화요일 떠나는 남도맛 기행열차에는 각 지방의 먹거리들을 맛보려는 이들이 매번 찾아 든다. 1박2일로 떠나는데 남도 지방의 토속 음식들을 돌아가며 맛본다. 매달 한번 떠나는 2박3일짜리 남도 미각투어에서는 일정의 9끼 식사 중 6끼 정도를 먹거리 주제로 삼는다. 이종승 사장은 "지방 음식이 주제여서 그런지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많이 다닌다"고 소개한다. 주말이 아닌 주중을 택하는 이유는 유명 식당들이 주말에 너무 복잡해 맛을 음미할 수 없어서다.
/박원식기자 par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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