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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만화] 노미호와 주리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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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우리만화] 노미호와 주리혜

입력
2003.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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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개발독재가 급물살을 탔던 시기다. 어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 인민복을 닮은 '재건복'이란 걸 입었다. 획일화와 효율성만이 강조되던 그 시절에 청소년 문화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사치였다. 영화관에 출입하는 비행 학생을 적발하기 위해 극장마다 생활지도교사가 암행했고, 관람석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뒤쪽 높은 곳에는 경찰관 용 임검석이 따로 있었다.이런 캄캄했던 시대를 뚫고, 남녀 고교생이 벌이는 풋풋한 '강아지 사랑'(puppy love)을 소재로 한 만화가 발표돼 청소년 사이에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65년 월간'여학생'에 발표된 '노미호와 주리혜'란 연재 만화였다.

박기준(朴基埈·62) 선생이 처음 연재를 시작한 이 만화 제목은 세익스피어 원작의 '로미오와 쥴리엣'을 한국식으로 패러디한 것이었다. 4쪽 분량에 그림 칸은 모두 30여 개. 66년부터 박 선생의 후배 이상무(본명 박노철· 57세)가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더욱 큰 인기를 끌어 모았다. 깔끔한 그림체와 청소년의 심리를 꿰뚫는 작가의 역량 때문이었다. 이상무의 '노미호와 주리혜'는 80년까지 무려 15년 간이나 연재됐다.

'노미호와 주리혜'의 내용은 요즘 청소년들이 보면 "유치하다"고 말할 게 뻔한 줄거리다. 노미호는 언제나 교모를 쓰고 등장하고, 주리혜 역시 여고생 단발머리에 교복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다. 매월 하나씩 소개되는 에피소드도 거기에서 거기다. 66년 11월호 여학생에 실린 만화내용을 소개해 보면 이렇다.

주리혜의 옆집에 핸섬하고 공부 잘하는 남자 고교생 서일록이 이사를 온다. 서일록은 이사온 당일 배구공을 주리혜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고는, 공을 주워달라며 주리혜와 '접선'을 시도한다.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초등학교 동창 사이임이 밝혀지자 주리혜와 서일록의 관계는 급속히 가까워진다. 이 광경을 창문으로 지켜본 노미호는 새로운 연적의 등장에 위기 의식을 느낀다. 급기야 여동생 돼지 저금통을 털어 주리혜의 남동생을 구워삶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황으로 보아 '노미호와 주리혜'의 교제는 청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남녀를 분리한 반 편성은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성 간의 접촉을 강제로 차단했다. '남녀칠세부동석' 원칙이 제도권 교육에서 철저하게 시행된 시기였다. 중고생들의 학교 밖 이성교제는 불량학생의 소행으로 간주됐다. 청소년의 외출복은 당연히 교복이었고 그 옷차림은 청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옭아 맨 족쇄였다. 그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지금의 부모 세대에게는 책갈피에 끼워놓았던 단풍나무 잎사귀처럼,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 만화는 가슴 한 쪽에 고이 자리잡는다.

중견만화가 이상무는 '노미호와 주리혜' 로 확고한 작가반열에 올라섰다. 70년대 중반이후 에는 '독고탁'이라는 만화주인공을 내세워 역경을 이겨내는 감동적인 소년만화를 잇달아 발표해 당대 최고만화가로 우뚝 섰다.

/손상익·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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