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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메이커]광주일고 야구감독 허세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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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메이커]광주일고 야구감독 허세환씨

입력
2003.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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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섭이요? 책임감 있지, 성격 원만하지, 자기 관리 철저하지, 어디 가든 귀여움 받을 선수입니다. 그라운드에 머리를 찧었다는 소식에 가슴 철렁했는데 이번 사고로 오히려 유명선수가 됐으니 더 잘 해야죠." "병현이는 말이 없어 거만하다는 소리를 듣곤 하지만 실은 웬만큼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수줍어서 말을 못하는 성격 때문에 오해를 받는 겁니다. 보스턴으로 옮긴 후 낯가림 하지 않고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재응이가 안 풀릴 때 아버지가 찾아 와 함께 술을 하며 답답함을 풀곤 했는데 이제 3승까지 올렸으니 신이 납니다." 지난 주 청룡기고교야구 때문에 서울에 올라 온 허세환(許世煥·42) 광주일고 감독은 모처럼 제자들의 승리가 이어지면서 축하인사 받기에 바빴다. 현재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선수 6명중 3명이 제자이니 어깨에 힘 좀 준다고 뭐라 할 사람이 있겠는가. 더욱이 박찬호의 부진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이들에게 몰리고 있는데. 하지만 그는 "운 좋게 좋은 선수들을 만나 성적 낸 게 고마울 뿐이죠. 제가 한 일이 뭐 있나요"라고 겸손을 보이고는 "감독에게는 당장 코 앞의 성적이 전부"라며 팀의 8강탈락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동대문운동장 인근 여관에 묵으며 중계를 본 허감독은 김병현(보스턴 레드삭스)이 빨간 양말을 신은 후 첫 승을 기록하고, 서재응(뉴욕 메츠)이 시즌 3승째를 올리고, 주춤했던 최희섭(시카고 컵스)의 방망이가 다시 터져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러던 중 8일 새벽 최희섭이 뇌진탕으로 정신을 잃는 사고가 발생한 것. 허감독은 대회 중에는 반드시 다음날 경기에 지장이 없도록 선수와 함께 자고 일어 나기 때문에 이날 중계를 보지 못했다. 몇시간 후 최희섭이 깨어 났다는 연락에 한숨을 돌리고 곧바로 천안북일과의 청룡기 2회전에 나서서는 연장까지 가는 사투 끝에 짜릿한 승리를 맛보았다.

선수들도 연속되는 선배들의 승리에 사기가 한껏 오른 것 같아 흐뭇했다. 그러나 10일 8강전에서는 대통령배 우승팀 대구고에 5-9로 져 제동이 걸렸다. 4월 대통령배에서도 1회전서 대구고를 만나 졌으니 대진운이 안 따라 주는 편이었다.

이럴 때면 2학년 김병현과 3학년 서재응이 마운드를 굳건히 지키고 1학년 최희섭이 홈런을 날려대던 95년이 생각 나기도 한다. 당시 덕수상고와의 청룡기 결승전에서 김병현은 6회까지 던지고 8회 무사만루의 위기에서 다시 나와 마무리, 23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하며 최우수선수가 됐다. 그는 이날 무려 18개의 삼진을 잡았다. 서재응은 3루를 맡다가 7회에 등판, 1안타로 잘 막아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최희섭 역시 대회 중 5할에 가까운 타격으로 공격을 리드했다.

허감독 본인은 선수를 잘 만났다고 하지만 이들이 그의 뛰어난 안목과 노력으로 만들어 진 작품이라는데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서재응과 김병현은 당초 투수가 아니었다.

서재응의 포지션은 충장중 시절 3루수. 그러나 1루에 송구할 때의 자세가 워낙 '예뻐' 허감독의 눈에 투수감으로 점찍혔다. 키도 당시는 170㎝를 조금 넘는 정도였지만 한참 더 클 것으로 보였다. 허감독은 그가 들어오자 마자 투수연습을 시켰다. 그러다 부상으로 운동을 잠시 쉬면서 키가 부쩍 컸고 볼에 스피드도 붙었다. 본인도 투수훈련을 재미있어 해 1학년말부터는 지역대회와 연습경기 때 마운드에 올리기 시작했다.

김병현은 무등중에서 유격수였다. 체구가 작고 발이 빨라 수비 폭이 넓었다. 하지만 손목 힘이 뛰어나 유격수로만 쓰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투수연습을 시켜보니 생각한 대로 가능성이 있었다. 요령도 좋고 본인도 투수를 원했다. 체구가 작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밤마다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시켰다. 동계훈련 때 는 중장거리 러닝을 소화하면서 볼의 속도가 느는 것을 느꼈다. 본인도 신이 나서 무거운 역기를 들고, 달리기를 계속했다. 지금 메이저리그에서도 뒤지지 않을 체력을 보유한 것은 그 때의 훈련이 바탕이 된 것이다.

물론 투수 출신이 아닌 허감독이 상식과 경험만으로 최고 투수를 양성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미국의 전문서적들을 구해 놀란 라이언 등 유명투수들의 투구법을 연구하고 끊임없이 투수출신 선배들의 조언을 구해야 했다.

최희섭은 서재응 김병현의 뒤를 이어 투수로 쓸 요량으로 스카우트했다. 당시 왼손잡이로서는 보기 드문 거포였지만 큰 체격과 왼손잡이라는 점이 투수로서 호조건이었다. 1학년 때부터 1루수에 4번을 치며 투수도 병행시켰다. 3학년에 올라 가서 까지도 투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잘못 하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되겠다는 불안감에 본인과 논의 끝에 3학년 초 타자로 방향을 굳혔다. 이들은 각기 다른 대학을 택했다. 서재응은 인하대, 김병현은 성균관대, 최희섭은 고려대.

97년 2학년 때 뉴욕 메츠에 135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간 서재응은 올 시즌 메이저리그에 올라왔으나 팀의 공격 부진으로 승수를 쌓지 못하다가 지난 7일 3승째를 기록했다. 특히 뛰어난 제구력을 지녀 6번째 등판, 103타자 만에야 첫 포볼을 내주는 메이저대회 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연고구단 해태의 고졸 우선선수 지명을 거부하고 성균관대에 갔던 김병현은 국가대표로서 국제대회에 나가면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공세를 받았으며 99년 3학년 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입단, 곧장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되고 2001년 마무리 투수로서 챔피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금년 시즌 중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해서도 1승을 기록.

99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해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타자가 된 최희섭은 장타자로 명성을 날리며 5월 신인왕이 되었다. 금년 시즌 홈런이 7개.

이밖에 서재응과 동기인 기아포수 김상훈을 비롯, 이호준(SK) 이현곤(기아) 정성훈(현대) 김광우(LG)등 프로선수들이 그의 제자이다.

허세환감독은 팬들에 이름이 낯설지만 국보급 투수로 성장한 선동열의 동기로서 80년 광주일고 전성기의 주역중 하나. 대통령배 우승때 선동열이 최우수선수상을 타고, 유격수인 허감독은 타격 최다안타 최다타점 수훈 도루상을 받아 5관왕에 올랐다. 동기생들은 선동열등 4명이 고려대, 허세환등 3명이 인하대로 진학했다. 그는 대학입학후 다리부상으로 거의 1년간을 쉬었지만 이후 전 국가대표인 선배 이선웅, 동기 양후승 등과 함께 인하대 전성기를 이뤘고 포철에 들어가 8년간 실업선수를 하다가 92년부터 모교에서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82년 프로야구가 생겼지만 계약금 액수가 자존심에 걸리는데다 당시 프로에 발을 들여 놓으면 아마추어에 지도자로도 돌아 오지 못하는 규정 때문에 망설이다 프로진출을 포기했다.

그가 유명한 프로출신 동문이 즐비한 가운데도 모교 감독의 영예를 안은 것은 그의 성실성을 인정한 김찬익 선배(현 프로야구 심판위원장)등 동문들의 강력한 추천 덕분이었다. 그는 감독이 되어서도 선수시절처럼 야무지고 섬세한 성격을 보인다. 기술적으로는 기본기를 중시하면서도 틀에 박힌 야구를 전수하기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과 특장을 살리 수 있도록 배려한다. 또 고지식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김찬익 위원장은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고 원리원칙을 따져 외부의 압력이나 부탁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학부모와의 관계도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정확해 오히려 학부모가 불평을 할 정도이지만 그런 깔끔한 성격이 그의 큰 장점이자 교장 선생님이 '전인교육의 적임자'라며 앞장 서 그를 재영입한 이유이다"고 설명한다.

그는 선수들에게는 운동 선수 이전에 인간의 기본 됨됨이를 갖출 것을 강조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남을 배려하는 자세를 익히며 틈나는 대로 영어와 한자 공부를 하도록 유도한다.

물론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은 잔소리 하나 할 게 없는 모범생이었다. 허감독은 김병현이 2001년 월드시리즈 우승후 모교 방문때 보도진을 따돌리고 사라졌던 사건에 대해 "거만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움이 많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과는 장난도 잘 치는 성격이다. '월드시리즈에서 우승 했어도 본인은 기여한 게 없는데 매스컴이 몰려드니 창피해 달아난 것 뿐이지 절대 짜증을 낸 게 아니다'라고 하더라"고 대신 해명한다.

그는 92년부터 8년간 광주일고를 지도하다 학교를 떠났었다. 평범한 체육교사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충장중에 가서 다시 야구팀을 맡았다가 지난해 12월 광주일고에 복귀했다.

운동 지도자를 하면서 과정은 무시되고 결과만으로 평가되는 현실이 불만이었다고 한다. 모두 승패에 집착하다보니 압박감이 심했다. 지금도 성적이 안 나면 외롭고 힘들다. 야구감독이란 성적에만 매달리는 불안정한 직업이고, 언젠가 학생들에게 야구 이외에 폭넓은 지식과 인성을 교육하고 싶다는 게 그의 희망이다.

지금 광주일고 선수들은 메이저리거의 후배라는 자부심에 사기충천해 있다. 지난 겨울에는 김병현 서재응이 와서 한달 반 동안 같이 훈련하고 갔다. 허감독은 작년에 대통령배와 청룡기에서 우승한 주전멤버들이 졸업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1∼2년간 재정비하면 다시 정상팀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학년 투수인 나승현은 김병현 서재응의 뒤를 이을 유망주로 꼽고 있다. 청룡기 1회전서 8회까지 무실점하고, 천안북일고와의 2회전서도 4회부터 10회까지 6안타에 1실점(비자책)만 하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언더스로 투수인 유대한과 내야수 강정호 김성현도 뛰어나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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