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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63>시인 김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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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63>시인 김정환

입력
2003.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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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마포로 되어 있지만, 일설에 의하면 6·25 전쟁 후 직업군인으로 눌러앉은 아버지를 따라 임지인 신남으로 가던 도중 어머니가 헬리콥터 안에서 나를 '떨구셨다'고 한다. 그래, 그 일설에 의하면 문학은 덜컹대는 혹은 방방 뜨는 내 '육체=영혼'을 어떻게든지 지상에 묶어두려는 닻 혹은 그물일지 모른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글을 썼다는 얘기가 아니다. 내가 글로 혹은 몸으로 방방 뜨기 시작했거나 여전히 뜨는 것은 육체의 몸무게와 비례해서다. 그렇다면 내게 문학은 무용 예술의 기쁨이 아니라 고통쯤 되는 걸까?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이거, 이거, 내가 나를 인용해야겠군. 위험한데….

내 눈을 처음 때린 것은 내장이 터진 생선이었다. 피 묻은 비늘이 잔인한 눈물을 반짝였다. 냄새? 아니야…. 색깔이다. 뱃속은 어둡고, 비린내가 코에 습관으로 굳어서 세상의 비린내는 한참 동안 비리지 않고 편안하다. 충격은 역시 색깔의 광경이지.(졸작 '파경과 광경', '색장'에서)

문득 의식의 빈자리에 웅성대는 감각의 총체의 광채가 더욱 눈부시다. 내가 어찌 세상에 태어났는가. 어머니 뱃속은 따스했던가. 첫 울음은 무슨 뜻이었던가… 맨 처음 눈에 보이는 것이 두려웠는가? 첫 울음은 물의 '체온인 기억'을 물의 '경악인 소리'로 떨쳐낸다. 그렇게 두려움은 본능이 아니라 본질이고 육체다. 그때 우리는 산 채로 도마에 오른 물고기의 몸짓과 같다. 의식의 빈자리는 비늘처럼 반짝인다. 그렇게 인간의 삶은 당분간 물고기의 죽음과 같다. 두려운 채로 안온한, 아니 두려움이 안온한…. 그때의 한 순간, 머리가 토막 난 꽁치 한 마리가 내 시야에 잡혔다. 그리고 나는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느꼈다. 태어난 지 사흘이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훗날의 그 숱한 꽁치 굽는 냄새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떤 종류의 군침과도 상관없는 시야의 이물질(異物質)이었으니까. 나는 그 이물감의, '최단(最短) 혹은 단초(端初)의 거리'가 될수록 완강하기를 바라면서 인생이라는 '말'의 뜻을 감 잡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의식의 빈자리에서 말은 지칭(指稱)에 지나지 않고 지칭은 내용 없는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지칭의 거리가 사라질 때 명령은 다시 본능이 아니라 육체다.(졸문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 '프롤로그'에서)

두 글 사이에는 3년의 간격이 있다. 그밖에 '파경…'은 소설이고 '이 세상의…'는 자전적 산문이다. 그렇다면 최근 나의 문학은 나를 이해하고 정리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시대의 간절한 소망에 미학적 총체를 부여하는 일이 내 시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계급 운동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 '정치적인' 황홀한 죽음과 겹쳐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그것을 절벽의 미학으로 형상화하려 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내 몸 안에 축적된 야만의 20세기 역사를 씻어내는 정화 의식으로서 문학이 왔다. 그 과정에 나는 숱한 여타 예술 장르와 만났다. 하지만 나는 전방위 예술가라는 말을 싫어한다. 나의 문학 나의 시는 외적 복무에서 죽음을 거쳐 내적 복무의 길로 접어들었을 뿐이다.

음악은 자연의 소리에서, 미술은 자연의 색과 형용에서, 춤은 인간 육체와 영혼의 변증법에서 비롯된다. 즉, 이미 주어진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문학은 인간이 만든 말 혹은 문자에서 비롯한다. 인간은 80% 이상을 눈(미술)을 통해, 10% 이상을 귀(음악)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하지만 이성은 인간이 만든 문자의 논리에 너무 많은 권리를 부여해 왔다. 알아 '들을' 수 있는 글, 알아 '볼' 수 있는 글, 심지어 알아 '먹을' 수 있는 글. 그렇게 이성의 독재는 글의 독재이고, 그러나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이야기로 시작되고 이야기는 난해를 포괄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심지어 문장보다 더 전에 있었다. 문장이 세상에 대한 의문부호를 체화하는 과정의 산물인 까닭이다. 문장이 문체로 되는 것은 생애의 집적을 요한다. 그렇게 문체는 세계관을 담는다. 그 문체들이 소설의 세계를 이루려면 또 한참의 문체의 생애를 요한다. 시 또한 그렇다. 세계의 질서가 인간의 시적 통찰에 아찔한 찰나로 포착된다. 그것은 심지어 비유보다 먼저 포착된다. 비유는 그 통찰을 체화하는 과정의 산물인 까닭이다. 비유가 시로 되는 것은 그러나 통찰의 생애를 요한다. 시는 소설보다 먼저 삶을 아찔한 영원의 순간과, 그렇게 죽음과 동일시하지만 그 시가 시문학으로 되려면 단 몇 줄을 위해 시의 생애 모든 것이 소요된다.

'이성=글'의 독재를 예술의 민주주의로 극복하는 길을 내 문학은 모색하고 있다. 예술 장르 '위' 독재로서 문학이 아니라 예술 장르 '사이' 소통으로서 문학이 더 의미 있는 것 아닐까? 아니 모든 장르가 그런 것 아닐까? 어쨌든 시의 '언어=이야기'가 음악의, 미술의, 연극의, 그리고 온갖 예술 장르의, 그리고 역사의 '언어=이야기'와 만나 살을 섞는 과정은 언제나, 영혼의 섹스보다 에로틱하고 황홀하다. '시=문학'은 때로 예술 육체를 입기도 하고 때로 예술 육체를 응축―총체화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 도서반 시절 독서토론을 할 때마다 나를 늘 괴롭혔던 질문은 '이 작품의 주제가 뭐냐?'는 질문이었다. 그 약점은 매우 오랫동안 나를 열등감 콤플렉스에 젖게 만들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자랑스럽다. 도대체 작품에 '인간 자체' 말고 무슨 주제가 따로 있단 말인가? 대학교 교양학부 때 첫 '자기 표현' 시간에 죽을 쑤고 연극반을 했지만 내내 뒷전을 맴돌았다. 무대 공포증 때문이었다. 오만한 완벽 지향, 혹은 결벽증의 표현이었던 그 무대공포증을 나는 징역과 군역 생활의 모멸을 겪으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은 형상화 실패 연속의 생애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고쳤다.

따지고 보면 나는 문학을 한 게 아니라, 당했다. 내가 쓴 산문의 80% 이상은 '땜통'으로 쓰여졌다. 시 또한 모종의 필요가 창작의 계기였고, 첫 시집은 군 생활 중 현재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단 몇 줄만 수정하고 그대로 펴낸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문청' 기간을 국가에 압수당했고, 그래서 아직도 문청 기질을 채 벗지 못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을 자조적으로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문학은 늘 주변, 낮은 자리에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정치 냄새가 나고, 땜통의 근본화가 더 예술적일 것 같은 까닭이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중문화운동연합―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 '대장' 노릇을 수년 간 하다 임기를 마치면서 나는 후배들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한 바 있다. 예술학교―잡지사―공연장을 합친 복합 건물을 하나 지어 보마, 그리고 제대로 된 예술 교양서를 써 보마…. 이것이 문학 예술의 외적 기여와 내적 기여의 상호 침투 및 심화―확대의 계기가 되었기에 나는 아마도 가장 행복한 시인 중 하나다. 강제징집을 당할 당시 영장이 할아버지의 손자 것, 아버지의 아들 것 두 개 나오는 거라, 시간도 없고 해서 할아버지의 손자 호적은 사망 신고를 했으니, 서류상 반은 죽은 몸이다. 이런 말이 또 삶 밖으로 새는군…. 끝으로, 광고나 한 마디. 최근 간행된 방대한, 장정과 디자인이 너무도 맘에 드는 '한국사 오디세이'에 나는 '20년 넘게 치열하게 또 다양하게 단련시켜온 문학―예술성을 온전히 쏟아' 부었다.

● 연보

1954년 서울 출생 1980년 서울대 영문과 졸업·계간 '창작과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 6편 발표 등단 1994년∼현재 한국문학학교 교장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하나의 二人舞(이인무)와 세 개의 一人舞(일인무)' '황색 예수전' '회복기' '좋은 꽃' '해방 서시' '우리 노동자' '기차에 대하여' '사랑, 피티' '희망의 나이' '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 '텅 빈 극장' '죽음의 기억' '해가 뜨다' 소설 '세상 속으로' '그 후' '사랑의 생애' '파경과 광경' 산문집 '발언집' 문학평론집 '삶의 시, 해방의 문학' 음악교양서 '클래식은 내 친구' '내 영혼의 음악' 역사교양서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상상하는 한국사' '한국사 오디세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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