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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24> 고래를 삼킨 새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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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24> 고래를 삼킨 새우

입력
2003.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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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1일)는 잊지 못할 날이었다. 미국계 투자전문 펀드인 서버러스, 휠라 아메리카와 더불어 휠라 코리아가 추진했던 휠라 본사 인수작업이 모두 마무리돼 어제 뉴욕과 서울에서 동시에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3월7일 계약서에 서명했으니 꼬박 3개월3일 만에 인수작업이 끝났다. 이 기간 동안 본사이전, 고용승계 등을 위해 5차례나 출장을 다녔고 밤낮없이 전화통에 매달렸다. 하루 평균 3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새우(휠라 코리아)가 고래(휠라 본사)를 잡아 먹었다"고 표현했지만,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사람들이 휠라 매각 소식에 가뜩이나 마음이 상한 터라 괜한 오해를 하지 않을 까 마음고생도 심했다.

사실 휠라 인수 과정에 대해서 '나의 이력서'를 시작할 때부터 털어놓고 싶었으나 인수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겠다.

우선 세계 50여개국에 매장만 9,000여개를 갖고 있어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에 이어 세계 4위 스포츠 브랜드로 꼽히는 휠라가 왜 주인이 바뀌게 됐는지 부터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휠라는 원래 1926년 이탈리아 비엘라라는 소도시에서 설립된 속옷 회사였다. 하지만 1972년 엔리꼬 프레셔가 스포츠 의류 부문으로 진출하면서 세계적 브랜드로 도약하는 발판이 마련됐다.

휠라의 창립자는 휠라 패밀리였지만, 스니어, 재미나 등을 거쳐 1987년 다시 소유권이 HDP로 넘어갔다. 문제는 HDP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의류나 신발 사업에는 무지한 금융 전문가들이었다는 것이다.

휠라는 세계 시장의 양대 기둥인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매출이 급감하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엄청난 적자가 쌓이기 시작했다. 1997년 한해 적자만 무려 1억5,000만 달러를 기록한데 이어 98년에도 1억 달러 가까이 적자가 났다.

98년께 훼라리 마케팅 담당 부사장을 지냈던 미켈레 스카나비니를 최고경영자(CEO)로 전격 영입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지만, 그도 적자의 수렁에서 벗어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늘어만 가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한 HDP는 2000년 패션과 신발 부문 사업을 접고 언론 사업 등에 주력하기로 방침을 굳혔다. 발렌티노 등 브랜드 일부를 매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본사 매각 소식을 처음 들은 것도 이 무렵이다. 휠라처럼 덩치가 큰 브랜드를 매각하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저런 소문만 무성했고, 실제로 드러나는 움직임은 없었다.

원래 몸 담고 있는 회사가 매각 대상에 오르면 곧바로 영업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직원들에게 철저한 입 조심을 강조한 때문인지 다행히 휠라 코리아는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 속의 불안감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누가 새 주인으로 오든지 그 사람이 가장 먼저 할 일은 휠라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고 있는 나를 해고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휠라 전체를 먹여 살리다시피 했는데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인수 작업에 참여해야 한다.' 자칫하면 그 동안 휠라 코리아에서 이룬 성과도 날려버릴 수 있는 위험한 결정이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굳어졌다.

휠라 내부에서도 이미 "휠라 코리아의 진 윤이 결국 휠라를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90년대 중반이후 휠라 전체 매출에서 휠라 코리아가 차지하는 비중이 20%를 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입지를 갖고 있었다.

그래도 쉽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하는 월드와이드 브랜드를 아시아인이 홀로 인수한다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인수에 성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지만, 인수하고 나서도 자칫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

결국 내게 '동맹군'이 필요했다. 나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나를 필요로 하는 동맹군. 휠라 본사가 매각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 동안 나는 침묵을 지키며 협상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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