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애에서 출생만큼 중요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도 드물다. 인간은 누구의 자식으로, 남자 또는 여자로, 특정 국가의 시민으로, 특정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백인이나 흑인 또는 황인종으로, 잘 생기거나 못나게,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그리고 특별한 재능이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다. 출생과 함께 결정되는 이 다양한 요소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운의 결과인데도 인간의 행·불행, 빈부와 귀천을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출생은 개인의 미래를 예측할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돼 왔다. 많은 사람들이 태어난 연월일시에 의해 길흉화복이 대강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년월일시의 사주팔자(四柱八字) 해석이 발달했으며 아직까지도 연말연시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토정비결 등으로 새해 운세를 풀이하는 연례행사를 치른다. 사업, 혼인, 이사와 같은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도 어김없이 점술집을 찾는 사람들이 있으며, 정치가와 사업가 가운데도 큰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신통하다고 소문난 역술인에게 사주팔자와 운세풀이를 의뢰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양에서도 출생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된다. 중세 서양에서는 점성술이 크게 성행했다. 점성술은 개인의 운명이 태어난 시점의 별의 위치와 빛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에 바탕하고 있다. 따라서 출생은 매우 각별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자연과학이 점성술을 대체해 버린 지금은 출생의 의미를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즉, 태어난 아이의 미래는 태어난 시점의 별자리보다는 부모의 신체적 특징과 경제·사회적 지위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별자리를 읽는 대신에 보다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출생이 개인의 장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출생과 결부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공한다. 1547년 헨리 8세 시대의 영국에서 에드워드 왕자가 태어났다. 그런데 바로 같은 날 런던의 허름한 뒷골목에서 에드워드 왕자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은 톰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다. 출생이라는 우연을 통해 한 아이는 왕자로, 한 아이는 거지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10년의 세월이 지난 뒤 에드워드 왕자는 우연히 만난 거지소년 톰과 장난 삼아 옷을 바꿔 입는다. 왕자는 진짜 거지로 오해 받고, 온갖 구박을 받으며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다. 반면 톰은 진짜 왕자로 행세하면서 호화스러운 궁중생활을 만끽한다. 졸지에 거지신세로 전락한 에드워드 왕자는 현군으로만 알았던 아버지 헨리 8세가 사실은 폭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서민들의 생활과 애환도 몸소 체험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 8세가 죽고 왕위 계승 소식을 전해들은 에드워드 왕자는 마일즈라는 기사의 도움을 받아 왕궁으로 가서 톰이 왕관을 쓰기 직전 진실을 밝히고 왕위에 즉위한다. 서민 생활의 고충을 체험한 에드워드 왕자는 서민들 편에 서서 통치할 것을 다짐한다.
'왕자와 거지'를 통해 마크 트웨인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다. 같은 날 태어난 비슷하게 생긴 두 아이의 상황과 지위를 대조해 출생이 개인의 운명을 얼마나 결정적으로 좌우하는가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왕자와 거지의 역할이 뒤바뀐 우연한 사건을 통해 출생에 의해 결정된 신분의 차이가 우연한 운명의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조선 광해군 때 허균이 지은 소설 '홍길동전' 역시 출생에 의한 귀천과 행·불행의 부당함을 고발한다. 한양에 사는 홍 판서와 시비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길동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능이 돋보였으나 서출인 관계로 호부호형(呼父呼兄)도 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길동의 재능에 위기를 느낀 가족들은 길동을 없애려 했지만 위기를 모면한 길동은 방랑 길에 오른다. 그러나 곧 도적의 두목이 돼 활빈당을 조직, 갖은 계략과 도술을 써가며 탐관오리의 부정한 재물을 탈취해 빈민들을 돕는 데 쓴다. 그 뒤 고국을 떠나 산수 좋은 율도국을 발견, 요괴를 물리친 후 율도국을 통치하게 된다.
'홍길동전'은 출생에 의해 정해지는 적서(嫡庶)와 반상(班常)의 대조적 인생전망이 도덕적으로 결코 정당하지 않다는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출생에 의해 행·불행과 빈부귀천이 결정된다면 개인의 재능과 노력은 별로 의미가 없다. 허균이 볼 때 출생이라는 '자연적 제비뽑기'로 인생의 대부분을 결정해 버리는 신분제도야말로 가장 시급하게 타파돼야 할 사회악이었다.
평등과 자유에 대한 의식이 고조된 현대는 조선시대나 헨리 8세 당시의 영국사회와 달리 출생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진 않는다. 사회가 자유화, 민주화함에 따라 대부분의 나라에서 신분제도가 폐지됐다. 그러나 지금도 중요한 삶의 요소가 출생에 의해 결정되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며, 생애 전체에 걸쳐 지속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어느 사회에나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문가가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 케네디가·록펠러가·부시가 등은 잘 알려진 예이며, 우리사회에도 '명문가 자손'이란 말이 있듯 엄연히 명문가가 존재한다. 명문가는 혼인이나 엄격한 훈련을 통해 특권과 명예, 부와 권력을 세습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출생은 이 세습 과정의 핵심고리를 차지한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현대사회에서도 출생이 여전히 중요한 사회철학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출생이 다양한 특권과 불평등의 세습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도덕적으로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하지만 출생을 통해 개인이 맞게 되는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은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아이는 강남의 초호화 아파트에서 태어나 고른 영양의 음식을 섭취하며 소위 일류 과외선생의 지도를 받는다. 반면 다른 아이는 달동네의 초라한 집에서 태어나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더러 예외는 있지만 이들의 인생전망이 크게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같은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한 가지 조직원리는 '기회의 평등'이다. 하지만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다양한 불평등은 이 원칙의 진실성을 의심케 한다. 출생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출발선이 크게 다르다. 명백히 출발선이 다른 상황을 두고 '평등한 기회'의 존재를 운위하기는 어렵다.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중요한 불평등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한 사회가 진실로 '기회의 평등' 원칙에 입각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출생이라는 사건은 비단 인생의 출발선에서의 불평등과 연관돼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과 같은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도 은근히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자신의 성공과 행운을 자식들에게 대물려 주려는 부모의 집착과 결합해 빈부로 양분된 사회구조를 지속하는 데 기여한다. 사회 특권층 가문 사이에 유행하는 정략결혼의 관행이 그런 예이다.
부와 명예, 권력과 기회의 배분을 출생과 같은 우연적 요인에 맡기는 것은 도덕적으로 볼 때 큰 문제가 있다. 따라서 정의로운 사회의 구축을 위해서는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불평등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데 있어서 행복하게 출생한 아이들의 행운을 박탈하기보다는 반대되는 아이의 불운을 덜어 주는 방법이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김 비 환 성균관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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