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숲은 물질로서의 가치와 더불어 우리의 내면을 움직일 수 있는 정신적인 힘 또한 매우 크다. 나무와 숲은 아주 옛날부터 신령의 주거지며 토속신앙의 모체로 여겨져서 사람들은 곳곳에 있는 당산목이나 마을 숲을 자연스럽게 잘 보호하고 유지해왔다. 우리 선조들은 어떤 중요한 시설을 해 놓고 천연적으로 형성된 숲을 이용해 이것을 보호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인위적으로 나무를 심고 가꾸어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다.전라남도 광양시 인동리에 있는 유당공원(柳塘公園)의 이팝나무가 있는 숲이 바로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숲이다. 유당공원은 광양시 남동쪽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데 광양만까지는 약 1㎞ 떨어져 있다. 지금은 시야가 가려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바다가 보였다고 한다. 조선조 명종(1545∼1576)때 왜구의 침략이 잦자 이곳에 성을 쌓은 뒤 이 성이 보이지 않도록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
당초에는 인동리에서 인서리까지 연결된 큰 숲이었으나 점차로 도시화에 밀려 그 중간 부분이 성과 함께 파괴됐고 지금은 이팝나무를 비롯하여 푸조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왕버들과 같은 노거수(老巨樹)만 남아 있다.
이곳 숲이 비교적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성에 대한 시설보호림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여름철 태풍진로 초입에 있는 성곽 주변지역의 풍수해를 완화해주는 기능을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숲은 비교적 여러 수종의 노거수가 있지만 가장 돋보이는 수종은 천연기념물 235호로 지정된 450년쯤 된 커다란 이팝나무다. 높이가 18m, 둘레가 3.5m나 되는 이 나무는 땅으로부터 2.5m 높이에서 줄기가 둘로 갈라지는데, 아마 전국에 있는 많은 이팝나무 중에서 가장 아름다고 균형이 잡힌 수형이라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봄꽃잔치가 모두 끝나고 초여름으로 접어들면 이팝나무에 하얀 꽃이 핀다. 가느다랗게 넷으로 갈라진 꽃잎 하나하나는 마치 뜸이 잘 든 밥알 같고, 이 꽃무리를 멀리서 보면 쌀밥을 수북이 그릇에 담아 놓은 것 같다. 이팝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다. 아직도 햇보리는 익지 않았고 지난해 거둔 양식은 거의 떨어져 가는 보릿고개 때 배고픔을 참고 농사일을 하다 쳐다보면 이팝나무 꽃이 영락없이 쌀밥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팝나무는 일본과 중국에도 분포하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하다. 서양 사람들은 눈꽃나무(snow flower)라고 불러 우리와는 매우 다른 정서를 가지는 나무이다.
전국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는 7그루가 있는데 대부분 당산목이나 신목(神木)으로 받들어진다. 지금도 꽃피는 모습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거나 마을에 행사가 있을 때 치성을 드리는 일이 흔하다. 아마 광양읍성을 쌓고서 이팝나무를 비롯하여 팽나무, 느티나무 등 신목이라고 할 수 있는 나무로 숲을 만든 것은 성의 은폐도 중요하지만 마을을 지켜줄 수 있는 신령스런 나무라는 것이 더 큰 수종선택의 이유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성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차폐림이었다가 차츰 태풍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 지금은 광양사람들의 쾌적한 으뜸 휴식처가 된 유당공원 이팝나무 숲이 현존하는 것은 더 큰 내일의 역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 헌 관 임업연구원 박사 hgchung2095@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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