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6월11일 러시아 총리를 지낸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가 뉴욕에서 작고했다. 향년 89세. 케렌스키는 1917년 10월 혁명 직후 핀란드와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고,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정착했다. 생애의 반이 훨씬 넘는 세월을 망명자로 살다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러시아와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다. 러시아 민중은 결국 그를 버리고 볼셰비키를 택했지만, 그 '민중의 선택'이 역사적으로 바람직했는지는 또렷하지 않다.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출신의 변호사 케렌스키는 1905년 사회주의혁명당에 가입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12년 제4차 두마(러시아의회)에 러시아노동당 소속으로 진출해 제도권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변호사 시절부터 정치범 변론으로 이름을 얻은 그는 1917년 2월 혁명 직후 사회주의혁명당에 복귀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을 맡으며 새 러시아의 권력 중심부로 들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 전체가 포연에 휩싸여 있던 그 해 3월13일 니콜라이2세가 퇴위하면서 러시아에는 공화정 형태의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케렌스키는 이 정부의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을 거쳐 7월에는 총리가 되었다.
정치 활동 초기부터 온건 사회주의자로 일관한 케렌스키는 법무부 장관이 되자마자 사형제를 폐지하고 언론 자유를 확대하고 보통선거제 도입을 꾀하는 등 민주주의적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러시아의 전 역사를 통해 사형제가 없었던 시절은 케렌스키가 정부에 머물러 있던 7개월 남짓 뿐이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전쟁에 지친 군인들과 일반 민중의 뜻을 거스르며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하다가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 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졌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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