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고생 끝에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개인 사업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휠라 코리아 시절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내가 휠라 코리아 사장으로 부임하자 사람들은 무척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내가 휠라 코리아 사장으로 영전할 수 있었던 것은 남보다 사람 복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의 재능을 인정하고 열정을 평가해준 사람들이 오늘 날의 나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물론 내가 그들의 마음을 열기까지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전동카트 사업에 한창 재미가 붙기 시작한 1991년 6월 무렵으로 기억한다. 호머 알티스에게 휠라 신발의 미국 시장 판권을 줬던 휠라 본사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의류사업보다 규모가 커버린 신발 사업의 미국 시장 판권을 본사가 다시 가져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후 휠라 본사는 라이선스를 갖고 있던 알티스에게 빅딜을 제안했다.
본사가 알티스에게 내줬던 라이선스를 회수하고 휠라 USA를 설립, 미국 시장을 직접 관리하는 대신 앞으로 6년 동안 알티스에게 2.5∼3.5%의 역 로열티를 주는 것은 물론, 휠라 USA의 사장 자리까지 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알티스 입장에선 꿩 먹고 알 먹는 거래였지만, 휠라 USA 사장자리는 그에게 무리였던 것 같다. 딸과 사위까지 회사 일에 참여하는 가족 중심적 경영 방식을 고집해 얼마 지나지않아 본사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휠라 본사는 6년 동안 줄 로열티를 한꺼번에 주는 조건으로 알티스를 내보냈다. 어쨌든 알티스는 휠라 사업을 통해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 메릴랜드주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업가로 선정돼 레이건 대통령 오찬에 초대 받았을 정도였다.
신발 사업을 9년 동안 하면서 벌어들인 수익과 역 로열티까지 합쳐 어림잡아 7,000만 달러는 벌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로서는 "휠라 사업으로 평생 만져 보지 못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처음 약속을 지킨 셈이다.
이 와중에 휠라 본사는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도 지사를 세우기로 하고 미국 시장의 신발 바이어들에게 사장 후보를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이 추천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한국에서 신발 사업을 하려면 진 윤을 잡아야 한다."
JC 페니 시절 처음 인연을 맺은 이래 10년간 끈끈하게 다져온 노력이 빛을 본 것이다. 사실 나는 이들이 1년에 두 차례씩 한국에 올 때마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한국을 떠날 때까지 꼼꼼하게 챙겨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휠라 본사에 휠라 코리아 사장으로 추천해준 사람들이 오랫동안 친분을 맺어온 미국의 신발 바이어들이라면, 내가 사장에 앉자마자 당시로서는 유례가 드문 100만 달러라는 고액 연봉을 받게 해준 사람은 알티스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본사는 휠라 사업에서 손을 떼려고 하는 알티스와 나의 대우 문제를 상의한 것이다. 이 때 알티스는 주저하지 않고 "진 윤은 100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로 인해 거부가 된 알티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대답이었는지 모른다. 언젠가 알티스는 "내가 휠라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진 윤, 당신이 없었더라면 내가 휠라로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라며 고마움을 표시한 적도 있다.
결국 내가 휠라 코리아 사장으로 부임할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내다보고 사람들에게 투자했기 때문이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이나 챙기려고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면 오늘의 이 자리는 아마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만약 어느 분야에서건 성공하고 싶다면, 사람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투자의 결실이 당장 나타나지 않더라도 결코 조급해 하지 말고 먼 훗날을 내다보고 느긋한 마음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
휠라 코리아 시절 이야기는 휠라 본사 인수에 얽힌 사연부터 먼저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휠라 USA와 공동으로 진행했던 본사 인수 작업이 오늘(11일)로 모두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