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총리 사이의 한일 정상회담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매우 상징적 의미를 갖는 회담이었다.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한국의 정국이 광복이후 세대로 완전히 세대교체했음을 말해준다. 노 대통령 자신이 광복이후 세대이기도 하다. 식민지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까닭에 과거에 얽매이지 않은 인식과 정책을 취할 수 있는 광복이후 세대가 한국을 주도하게 된 것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시대 개막을 의미한다. 일본도 이미 전후세대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바 있다. 일본의 전후세대는 더 이상 과거의 굴레에 연연하지 않고 점차 보통국가로서 자신의 의사에 따라 대외정책을 전개해나가려 한다.
양국 공히 과거사에 대해 콤플렉스를 갖는 구세대와는 달리 과거사에 속박되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가 양국의 정치전면에 등장함에 따라 새로운 공통분모와 협의의 양식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한일 특수관계에 기인한 양국간 막후 대화 파이프가 존재하여 관계악화를 막아왔지만, 양국의 새로운 세대간에는 그러한 파이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정상회담은 바로 한일의 새로운 세대간의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출발점이 되는 회담이었던 셈이다.
한국은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 천황 등의 사죄발언 수위에 초점을 맞춰 대일 정책을 폈다. 새로운 정부마다 과거사 청산을 명분으로 일본에 보다 강도 높은 사죄를 요구했으며, 그 결과 문제의 해결보다는 일본 내 혐한(嫌韓) 의식만 확산하는 부작용을 초래한 바 있다.
사실 한일 과거사 문제는 양국 정상의 선언에 의해 인위적으로 청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과거사 문제의 실질적 해결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과거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일본사회에 확산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일본 우익이 추진했던 왜곡된 역사 교과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일본사회의 성숙한 시민의식이었다. 문부성의 검정 통과에도 불구하고, 우익의 역사 교과서는 일선 학교에서 채택률이 0.04%에 불과했다.
노무현 정부는 일본측의 선언적 사죄 수위에 연연하지 않고 실질적 문제 해결에 초점을 두는 사고의 일대 전환을 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한일 정상회담에서 우리는 사죄를 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 관한 한국정부의 이 같은 혁명적 접근은 미래지향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본은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한국 신정부의 선의를 일본은 유사법제 통과라는 악수(惡手)로 답함으로써 한국 국민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일본이 과연 지역의 리더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유사법제는 자신에 대한 무력공격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이미 수년 전부터 추진되었으며 우리를 비롯한 모든 나라들이 갖추고 있는 법안임을 감안할 때, 어느 노정치가가 지적했듯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통과시킨 시점이다. 한일 월드컵이후 양국간 긍정적 상호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신정부가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한일관계의 메시지를 전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일본 국회가 유사법제를 통과시킨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 일본이 국제적 역할 확대를 모색할 때마다 걸림돌이 되어온 것은 과거사 문제였는데, 한국이 과거사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면죄부로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 될 것이다.
이제 일본의 차례다. 과거사 문제는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언제든지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폭발력을 갖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은 화려한 접대와 포장보다 진솔한 마음이 필요했다. 일본에게 묻고 싶다. 어떠한 한일관계가 좋은지를….
윤 덕 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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