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와 함께 올해로 도시 건립 300주년을 맞아 러시아의 새로운 심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5회에 걸쳐 조명하는 연재기획을 마련했다. 러시아의 대 유럽 창구이자 물류 및 산업의 중심지인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의 기종점으로 노무현 정부가 추진중인 동북아 물류중심기지 육성 및 TSR과 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 사업과도 맥이 닿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출신지인 이 고도는 러시아의 행정수도 후보지로도 부상하고 있다.
'백야(白夜)의 도시', '뼈의 도시', '유럽을 향한 창', '북구(北歐)의 베네치아', '혁명의 도시', '러시아 북부 수도'…. 이처럼 다양한 수식 만큼이나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역사의 빛과 그림자를 고스란히 간직한 영욕의 도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표트르 대제(1672∼1725)가 자신의 수호 성인 페트로(베드로)의 이름을 따 건설하기 시작했다. 300년 전인 1703년 5월 27일의 일이다. 당시 러시아는 발트해의 지배권을 놓고 스웨덴과 북방전쟁(1700∼1721년)을 벌이고 있었다. 내륙국가였던 러시아는 발트해를 통해 유럽으로 나아가는 해로를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쟁에 매달렸다. 표트르 대제는 전쟁의 와중이던 1703년, 발트해 연안 네바강 하구의 작은 촌락에 페트로파블로프스키 요새를 건설한다. 도시의 시작은 그렇게 수많은 피(전쟁)와 겹쳐졌다. 그러나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옮겨온 이후 200여년 동안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제정 러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외교의 중심지로서 화려한 역사를 꽃피우게 된다.
흔히 '유럽을 향한 창'으로 비유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서유럽의 선진기술, 사상, 문화의 유입처였다. 어린 시절 유럽 전역을 주유(周遊)하며 러시아의 낙후성을 절감한 표트르 대제는 후진적인 국가 시스템을 서구식으로 탈바꿈시킬 근대화 개혁에 착수했다. 러시아판 단발령(턱수염 제거)에서 달력개혁, 세제 및 행정 개혁, 학교 신설, 문자 개발, 해군 창설, 과학 아카데미 설립에 이르기까지 부국강병을 위한 전방위적인 서구화 개혁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그 결과 제정 러시아는 18·19세기 서유럽을 능가하는 문화 예술의 번영 시대를 구가했고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화려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혹한 전제정치와 농노제에 대한 불만이 자유주의적 지식인(인텔리겐챠)들 사이에 고조되면서 짜르 체제 타도의 혁명 사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1825년 자유주의적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된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서곡으로,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과 1917년 2월 혁명, 10월 혁명이 이어졌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17년 10월 소비에트 정권 등장 이후 레닌이 1918년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기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제2 도시로 전락한다. 비운은 지명의 변천사에서도 이어진다. 1차 대전 와중인 1914년 교전국 독일에 대한 감정이 악화됨에 따라 러시아식 표기인 페트로그라드로, 레닌 사망 직후인 1924년에는 레닌그라드로, 1991년 9월에는 주민 투표에 의해 다시 본명으로 돌아갔다.
소비에트 역사 70여년 동안 모스크바가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거점이자 소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의 모든 힘이 결집되는 거대도시로 부상하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반 수면 상태의 폐쇄적 공간으로 변해갔다. 남아 있던 것은 '문화의 수도'라는 자존심 뿐.
그러나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부활의 노래를 준비한다. 러시아는 소비에트 시대의 흔적과 잔재를 제거하고 일련의 국가제도와 상징물을 과거 제정 러시아 시대로 환원했다. 국명 '소련'(USSR)은 '러시아'에 자리를 내줬고 삼색기와 쌍두 독수리 국가 문장이 부활했으며 의회 이름도 '국가두마'로 환원됐다.
여기에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등장으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부활은 한층 탄력을 받는다. 푸틴이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이고 스스로 제2의 표트르 대제로 자처하고 있다는 점은 상징적인 부분. 실제로도 푸틴 정권은 국가 정체성을 유럽에 일치시키고 서구세계 편입을 위해 유럽 우선적 친 서방노선을 펼치고 있다. 또한 푸틴과 그 주변에 포진한 이른바 '피테르 마피아'(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 권력집단)들의 비호 하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정치·경제적 위상이 현저히 높아지며 모스크바에 고착됐던 국가권력의 이동 움직임마저 감지되고 있다. 최근 러시아 정계 일각에서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의 의회 이전 및 천도 문제가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을 정도다.
오욕의 역사를 마감하려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웅비는 2003년 5월이 시 창건 300주년이라는 정치적, 역사적 의미에 의해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300년 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제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유럽을 향한 창' 만이 아닌 '세계화를 향해 열린 창'이라는 점일 것이다.
기 연 수 한국외국어대 노어과 교수 러시아연구소 소장
● 도시 어떻게 생겨났나
제정 러시아와 교류했던 유럽국가들의 자료에 따르면 표트르 대제는 어려서부터 원숙한 외모에, 직선적이고 대담하며 활기가 넘치는 성격으로 묘사되고 있다. 키가 2m 4㎝에 달했다거나 말발굽 정도는 맨 손으로 구부릴 정도였다는 설명도 있다. 황제에 대한 얘기니 과장이 섞였을 가능성도 많지만 그가 거구였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익명으로 유럽을 돌아다닐 때도 신분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표르트 대제는 1682년 10살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17세때인 1689년이 되서야 황제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 기간 이복 누이 소피아가 궁중혁명으로 실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과학에 관심을 보였던 표트르 대제는 자주 유럽을 여행했고 신 문물에 매혹당했다. 그는 유럽에서 많은 과학자들을 만난 뒤 조선(造船), 천체, 군사 등의 신 지식을 품고 조국에 돌아왔다.
조국을 근대화하기로 결심한 그가 맨 처음 단행한 개혁은 다소 엉뚱했다. 1698년 봄 두명의 이발사를 궁전으로 들인 그는 8월 26일 황제의 귀국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귀족들의 턱수염을 잘라버렸다. 이른바 러시아판 단발령의 시작이다. 이어 전통 복장의 긴 소매를 잘라 유럽 식의 간편한 복장으로 대체했다.
표르트 대제는 1703년 5월 27일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을 시작한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네바강 하구의 늪지대에 도시를 세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잦은 침수와 연약한 지반 때문이었다. 지금도 10층이 넘어가는 고층건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특유의 강단으로 도시 건설을 밀어붙였다. 당시 그의 나이 31살. 오직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을 위해 러시아 전역의 공사가 중단됐다. 모든 자재와 기술자들은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의 유명 건축가들도 초빙됐다. 10년이 걸려 완성된 도시는 즉시 수도로 정해졌다. 전국 수십만 명의 농민들이 스웨덴과의 전쟁 중에 시작된 도시 건설에 동원됐고 이중 수만 명은 추위와 질병, 굶주림과 노역에 시달리며 죽어 갔다. 이 때문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뼈 위에 세운 도시', '피의 도시'라고도 한다. 현재 네바강과 68개의 운하가 100여개의 섬으로 갈라놓은 도시를 다시 600여 개의 다리가 연결하고 있다.
근대화 개혁의 상징으로, 유럽을 향해 열린 창으로 시작됐던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이후 자유로운 신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지만 같은 이유로 혁명의 도시로 커나가며 다시 피로 덮인다. 피를 잔뜩 머금어서일까,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아름다운 비장미가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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