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종종 '세상은 정말 좁다'고 감탄하게 된다. 몰락한 재벌총수의 명언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식 어법을 빌자면 '세상은 좁고 인연은 길다'쯤이 될까. 최근 업무 관계로 알게 된 어떤 여성은 알고 보니 잘 아는 후배의 친언니였고, 평소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유명 교수는 좀 멀긴 하지만 내 주변 인물의 남편으로 밝혀졌다.우연히 사귄 한 여성과 만남을 거듭하다 보니 그녀가 내 남편과 초등학교 시절 자그마치 5년 동안 단짝이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반갑다는 느낌 이전에 등에 진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오며 가며 만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동안 어떤 결례를 했는지 모르니까.
'좁은 세상'을 실감케 하는 이런저런 일을 겪다보면 조폭 아저씨들이 어깨에 새기고 다니는 '차카게 살자'가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미국의 물리학자 몇 사람이 케빈 베이컨이라는 남자 배우를 중심으로 헐리우드 배우들간의 관계도를 그려 본 결과, 22만5,000여명의 헐리우드 배우들은 최대 6단계, 평균적으로는 3.65단계만 거치면 누구나 하나의 그물같은 끈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할로우 맨'이라는 영화에 투명인간으로 나왔던 케빈 베이컨이 중심인물로 선정된 것은 배역을 가리지 않고 다작을 계속한 덕분이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그를 중심으로 줄긋기를 계속하다 보면 6명 정도를 사이에 두고 누구나 '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판보다 훨씬 작은, 내가 속한 이런 저런 집단에 같은 연구를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두세 사람만 거치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게 되는 건 아닐까.
간이 배밖으로 나와있던 병아리 기자 시절, 인터뷰 끝에 봉투를 내미는 상대방을 면전에서 좀 심하게 면박을 준 적이 있다. 어린 여기자에게 망신을 당한 그 남자와의 인연은 그 자리에서 끝일 줄만 알았다. 10여년 후, 난 그에게 긴요한 부탁이 있어 통화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일은…,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요즘 세상의 화두는 네트워킹이다. 어디를 가도 이 말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네트워킹은 꼭 사랑과도 같아서 내가 하면 네트워킹이지만 남이 하면 학연, 지연, 혈연이 된다.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 살자 식의 폐쇄적 네트워킹을 떠나 우리 모두 길든 짧든 '인연의 끈' 위에 놓여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에 대해 훨씬 관대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이덕규·자유기고가(boring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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