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보유 선언과 폐연료봉 재처리 강행 주장으로 한반도가 다시 핵 위기의 격랑을 맞고 있다. 한반도 핵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본사의 워싱턴, 도쿄, 베이징 주재 특파원들이 현지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을 만나 견해를 듣는 인터뷰 시리즈를 마련했다. 그 첫번째 순서로 1994년 한반도 핵 위기 때 영변 핵 시설 공습 계획을 세웠던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을 스탠퍼드대학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1994년 위기 때 영변 핵 시설에 대한 공격 계획을 마지막 순간에 철회했는데 그 배경은.
"우리는 북한 핵 문제를 다루기 위해 많은 비상계획을 검토했다. 영변 핵 시설을 재래식 정밀무기로 타격하는 계획도 그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 어떤 군사적 행동도 전면전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그런 전쟁을 피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교적 해결을 추구했다. 그 외교적 방안 중에는 한반도에 더 많은 군대를 주둔하는 것과 제재를 포함한 아주 공격적인 안도 있었다. 당시 영변 공격계획을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하지는 않았고, 따라서 그 계획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안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그 계획을 몰랐다는 말인가.
"클린턴 대통령은 물론 상황이 더 악화하면 내가 그 계획을 보고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또한 북한에 제재를 가하고 북한이 그 제재를 전쟁 행위로 간주, 우리를 기습 공격할 경우에 대비해 또 다른 계획도 신중히 검토했다. 우리가 북한을 먼저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던 것은 아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모든 선택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고 한다. 그 말은 94년 때와는 다르게 대응할 것이라는 뜻인가.
"그 말에 별로 중요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단지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나는 부시 대통령이 현시점에서 군사적 행동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계획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 또한 실수가 될 것이다."
―94년의 제네바 핵 합의가 없었다면 북한은 50개 정도의 핵 폭탄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수치는 영변의 기존 핵시설 능력만을 고려해 가장 낮게 추정한 것이고, 영변 단지 내에 추가 시설이 세워졌다면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북한이 1월 국제원자력기구(IAEA)사찰관을 추방할 때까지 영변 시설에 관한 한 그 합의가 잘 준수돼 왔다. 그러나 그들은 몇 년 전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을 시도했다. 이는 명백히 제네바 합의 위반이다."
―미국이 북한의 재처리를 확인할 경우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현재의 선택도 과거와 똑같다.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거나, 개발을 중지시키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하거나, 북한과 협상하는 3가지 중 하나다."
―북한이 추가로 핵을 보유한다면 그 상황은 과거와 다르지 않는가.
"북한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어서 핵과 미사일 개발 재원을 확보하는 길은 그것을 파는 것뿐이다. 주먹 크기의 플루토늄이 테러리스트의 수중에 들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의 단거리 미사일은 서울을, 중거리 미사일은 도쿄를 겨냥하고 있다. 일부 한국인들은 북한이 동족에게는 핵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안이한 생각이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자신을 겨냥하는 수십 개의 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본이 비핵 원칙을 포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아·태 지역이 핵 무기 경쟁 시대로 접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94년에도 그런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는 안보적 위험이라고 생각했고 오늘에도 마찬가지이다."
―클린턴 정부 때는 페리 프로세스라는 일관된 대북정책이 있었는데 현 미국 정부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아 북한 핵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페리 플랜은 아주 단순한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다. 북한이 핵을 갖는 상황은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안보적 위험을 야기하고,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협상으로 북한의 핵개발 계획을 제거할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 외교적 방법을 나는 '강압 외교(coercive diplomacy)'라고 부른다. 외교를 신뢰할 만한 군사력으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우리는 군사력을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사용해야 한다면 전면전을 촉발하지 않는 선이 돼야 한다."
―부시 정부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대담한 접근을 하겠다고 하는데 페리 플랜의 포괄적 접근안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
"같은 접근법이다. 우리는 북한에 이 접근법을 제시하고 대화했지만 부시 정부는 대담한 구상을 언론에만 설명하고 북한에는 제시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담한 접근법이란 북한에 '미사일과 핵을 포기하면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고, 경제적 혜택도 거둘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몇 년 전 평양에 갔을 때 그들에게 그런 제안을 했고, 그들은 관심을 보였다. 단지 그 구상을 말로만 해서는 안되고 그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대화가 없다는 점이다."
―부시 정부에는 북한의 정권교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내가 알기로는 부시 정부 내 군사적 공격으로 북한 정권 변화에 영향을 미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없다. 한국은 우리의 동맹국이고 우리는 독립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방식을 갖고 있지 않다. 군사적 방안에 의한 북한 정권 교체는 결코 미국의 선택방안이 아니다. 부시 정부 내 몇몇은 우리가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가해 북한이 더욱 어려워지면 내부로부터의 정권교체 즉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나치게 희망 섞인 견해다. 북한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경찰국가여서 내부 변혁의 가능성은 극히 낮다."
―경제제재나 해상봉쇄 등 조치가 실효성이 있다고 보는가.
"북한 경제는 최악의 수준이다. 또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은 그들과 거래하지 않는다. 우리는 북한과 다른 나라와의 거래를 차단해야 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이 그런 봉쇄에 참여한다면 매우 효과적이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은 북미 직접 대화를 원하고 미국은 다자적 해결을 모색하고 있어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어떤 방식으로 협상하느냐가 문제다. 모든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아 논의할 것인가, 한 사람이 다른 나라를 대표해서 협상할 것인가. 나는 북미간 양자적 토대에서 평양에 갔지만 한국의 대통령, 일본 총리와 긴밀한 협의를 거친 뒤였기 때문에 미국 대표만은 아니었다. 나는 '페리 박사가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를 대표한다'는 두 지도자의 친서를 가지고 갔다. 우리는 이전에 그랬듯이 양자적인 만남에서 다자적인 협의를 진행할 수 있다."
―북한 핵 위기를 해소하는 데 중국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건 여전히 내게 수수께끼다. 중국은 베이징 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건설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이 북한과 협상하기를 꺼리는 한 중국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
―향후 한반도 안보 정세를 전망한다면.
"너무 불투명하다. 북한이 핵 개발을 계속한다면 한반도는 매우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핵 문제가 해소되면 남북한의 화해를 통해 북한은 경제를 향상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남북간에 느슨한 연방 체제로 이어질 수 있다. 내 평생에 한반도에서 독일과 같은 통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두 체제는 너무 상이하다. 통일이 아니라 화해가 현실적 목표가 돼야 한다."
―최근의 한미 정상회담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견을 피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점 때문에 치른 대가이지만 나쁜 소식은 별로 이룬 게 없다는 것이다. 북한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에 대한 공동의 계획을 마련하는 데 아무 진전이 없었다. "
―국방장관을 지낸 분으로서 휴전선 부근의 미 2사단을 후방 배치하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라면 북한의 군사공격 가능성이 있는 한 그런 문제를 검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핵 문제를 책상에서 치울 수 있을 때가 한국에서 미군 병력을 크게 재조정할 때이다. 그 주 목적은 미국과 한국 정부의 군사 비용을 낮추고, 한국민들에 대한 불편을 줄이는 것이 돼야 한다."
/팰러 앨토(캘리포니아주)=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 윌리엄 페리
윌리엄 페리(76) 전 미 국방 장관은 학문과 사업적 배경을 실무에 접목한 미 국방·안보 분야의 산 증인이다. 지미 카터 정부 당시 국방부 연구·기술 담당 차관을 지냈고 빌 클린턴 정부 출범 당시 국방 부장관에 기용된 뒤 장관으로 승진 3년간 재임했다.
장관 재임시인 93년 말∼94년 초 북한 핵 위기 때 '전쟁 상황'을 가정한 미군의 한반도 전력 증강 작업을 지휘했다.
퇴임 후 98년 11월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의 대북 정책에 대한 의회의 반발을 고려해 신설한 대북정책조정관에 임명돼 다음해 이른바 '페리 보고서'를 냈다.
페리는 원래 수학자였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수학 분야로 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직을 전후로 국방 기술 분야 경영가로 활동하거나 스탠퍼드대 교수 및 국제안보·군축센터 소장을 맡았다. 현재는 스탠퍼드대 교수이다.'예방적 방위'등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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