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이유진(26)씨가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면서 '순혈주의'에 대한 논란이 일고있다. 이씨는 "혼혈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연예인으로 활동하는데 큰 지장이 있을 줄 알았다"며 자신의 출생 사실을 숨긴 점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혼혈에 대한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편견에 따라 혼혈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한국인끼리만 피를 섞어야 한다는 '순혈주의'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혼혈인들이 받는 인종차별이 위험 수위에 달하고 있다. 누구도 이들의 고통에 관심을 주지 않는 사이, 이들에 대한 편견만 계속 커지고 있어 정부와 국민들의 따뜻한 정책적 배려가 절실한 상황이다.1996년 기지촌에서 일하는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토니(7). 하지만 아버지는 "곧 연락하겠다"며 98년 미국으로 돌아간 뒤 깜깜 무소식이다. 올초 입학 연령이 된 토니를 데리고 동사무소를 찾은 어머니는 고심 끝에 호적 만들기를 포기했다. 출생 비밀이 알려지면 토니의 인생에 걸림돌만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지촌 주변 등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겪으며 인생의 출발점에서부터 좌절을 맛보고 있다.
한국의 혼혈아들은 국적취득과정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더구나 미혼 상태에서 태어나면 미국 시민권은 물론 한국 국적도 얻기가 어렵다. 따라서 미혼모의 혼혈아는 친척 호적에 등재되는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입적돼 법적인 보호조차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들의 고통은 학교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지난해 전북 군산의 한 중학교에 다니던 최모(14)양은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까무잡잡한 외모 때문에 일부 친구들이 '튀기'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하는 말로 최양을 괴롭혔다. 최양은 "선생님과 대부분의 친구들이 내가 당하는 고통을 이해해 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학내 행사에서 연주를 도맡아 할 정도로 피아노 실력이 탁월한 백인 혼혈 이모(18·고교2년)양도 최근에 등교를 거부하고 있다. 전국 연주대회에 자신보다 실력이 훨씬 떨어지는 다른 '순혈' 학생을 출전시킨 학교의 조치에 실망했기 때문. 혼혈아를 가진 일부 부모는 한국 학교의 차별적 교육이나 따돌림을 염려, 자식을 외국인학교에 보내려하지만 엄청난 교육비 때문에 이 또한 쉽지 않다.
학교에서의 편견과 차별은 사회로까지 이어져 대부분의 혼혈인이 경제적 빈곤 상태에 시달리고 있다. 이유진씨나 가수 윤수일, 인순이(본명·김인순), 박일준씨 등 연예인으로 성장한 혼혈인은 사정이 아주 좋은 편에 속한다. 기지촌 여성지원 단체인 새움터에 따르면 성인 혼혈인 가운데 약 30% 가량은 실직 상태이며 직업이 있더라도 건설 노동자 등 일용직 근로자가 대부분이다. 빈곤은 지속적인 사회적 편견으로 자식 세대까지 대물림 되고 있다.
기업체 등 취직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 필기시험에 통과해도 면접관들이 '사내 분위기' 운운하며 결국은 떨어뜨리기 일쑤다. 또 합격해도 '순혈' 합격자보다 훨씬 많은 수의 재정 보증인을 요구한다.
불이익을 경험한 혼혈 인재들은 아예 외국으로 떠나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18년 전 한국의 한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간 벤자민 윌커슨(46·IBM 연구원)씨는 "회장 감사패까지 받을 정도로 유능한 사원이었지만 승진 때마다 번번히 떨어졌다"며 한국 사회의 편견에 치를 떨었다.
이지영 펄벅 인터내셔널 한국팀장은 "현재 혼혈아 수는 1만여명 선이지만 급증하고 있는 동남아 출신 혼혈아까지 고려하면 10년 후에는 그 수가 10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운명의 공유, 언어의 동질성 등이 민족의 본질"이라며 "혈통의 차이가 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보고있다.
/범기영기자 bum7102@hk.co.kr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순혈주의 고집… 입양중 "해외"가 60%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그늘은 입양실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최근 5년간 국내·외 입양자료에 따르면 국내입양과 해외입양은 각각 8,302명과 1만2,014명으로 해외입양이 약 60%를 차지하고 있다. 해외입양이 훨씬 많은 이유는 '가계 계승'을 주목적으로 하는 국내입양의 경우 입양아의 건강상태나 용모, 혈액형 등을 따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국내 입양은 대부분 3세 미만 영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년 4,000∼6,000명씩 생겨나는 입양대상 아동의 상당수는 입양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동에게 장애가 있을 경우 국내입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근 5년간 국내의 장애아 입양은 불과 68명. 반면 해외입양은 3,946명으로 전체의 98%에 이른다. 장애아 입양에 대한 지원이 턱없이 낮은 것도 한 원인이다. 현재 장애아 입양에 따른 양육수당은 월 20만원. 의료비도 고작 매년 40만원에 불과해 구조적으로 장애아 입양이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나라는 고아수출국뿐 아니라 장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갖게 됐다. 서구인들이 대부분 입양아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을 나이에 입양사실을 알리는 반면 국내입양 가정의 경우 가계계승을 목적으로 하다 보니 입양사실을 공개하지 않는다.
복지부 관계자는 "국내입양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대책을 검토하고 있으나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국민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획기적으로 개선할 방안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해외입양과 시설보호의 대안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가정위탁제도는 친부모가 돌볼 수 없는 아이를 일반 가정에 위탁, 대리 양육토록 하는 제도로 2000년부터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지면서 공식화됐다. 1995년 자원봉사로서 가정위탁을 시작한 한국수양부모협회가 강력히 주창해 도입됐으며 지난해 5,577명의 아동이 일반가정에 맡겨져 양육되고 있다.
한국수양부모협회의 박영숙회장은 "혈통을 중시하지 않는 민족이나 나라가 어디 있겠느냐"면서 "하지만 순혈을 핑계로 사회가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비판했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또 하나의 벽 "호주제"
혼혈아임을 당당히 밝힌 탤런트 이유진씨에게 또 하나의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나고 호적에 외할아버지의 딸로 올라 법적으로는 어머니와 자매지간이 된 것이다.
현행 민법에서 자식은 아버지의 성(姓)과 본(本)을 따라야 하고, 미혼모의 자녀는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자'라고 해야 어머니 호적에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입학, 취업 등에 필요한 주민등록등본만 봐도 이 사실은 바로 드러나기 때문에 많은 미혼모, 이혼모들이 눈물을 머금고 친인척 등의 호적에 자식의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여성계는 이러한 모순이 호주제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며 호주제 폐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호주제 폐지 논란은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순혈주의에 기초한 가부장제를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호주제 폐지 운동의 핵심은 민법 상 아들을 1순위로 하는 호주승계 순위 규정 혼인한 여성의 남편 호적 입적 및 자녀의 아버지 호적 입적 등 부계혈통을 강조하는 규정의 개정이다. 출생, 결혼 등 개인의 신상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하는 호적제도의 작성 기준이 바로 남성 우선주의로 운영되는 호주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개인의 신분 변동을 기록할 1인1적제와 가족부. 한국여성단체연합 이경숙 상임대표는 "호주제는 21세기에 맞지 않는 전근대적인 제도로 일제의 잔재"라며 "많은 여성들에게 아픔만을 주는 불합리한 제도를 남녀가 동등한 관계로 설 수 있는 제도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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