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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20>鳳梧洞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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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820>鳳梧洞 전투

입력
2003.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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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6월7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소속 독립군이 일본군을 대파해 15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봉오동 전투라고 불리는 이 싸움의 승리는 그 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최대의 전과였고, 그 해 9월의 청산리(靑山里) 전투와 함께 항일 무장투쟁사의 가장 빛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봉오동 전투의 패배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일본 군부는 그 뒤 랴오둥(遼東) 반도의 관동군까지 동원해 독립군 진압에 나섰다.북로제1군 사령부 부장으로서 봉오동 전투를 지휘한 홍범도(1868∼1943)는 평북 자성 출신이다. 어려서 갑산으로 이사해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다가,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해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삼수·갑산 지역의 포수들을 이끌고 항일 유격전을 벌여 한 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한 바 있다. 홍범도는 1910년 한일합방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국경을 넘나들며 무장 투쟁에 복무했다. 52세의 나이로 봉오동 전투를 이끈 그는 석 달 뒤의 청산리 전투에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제1연대장으로 참가했다.

1945년의 광복이 조선인들의 항일 무장투쟁의 직접적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광복은 분명히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의 패전의 결과였다. 그러나 항일 무장투쟁이 없었다면 1945년 8월에 한반도가 일본의 강역에서 분리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무장투쟁은, 테러리즘과 더불어, 일본제국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겠다는 조선 민족의 열망을 가장 인상적인 방식으로 전세계에 드러냈다. 그럼으로써 한반도를 일본에서 떼어내는 것을 전후(戰後) 처리의 당연한 항목으로 전승국들에게 인식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항일 무장투쟁은 승리한 전쟁이었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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