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을 하다보면 처음부터 잘못된 일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설을 쓸 때도 그러하다. 고심 끝에 시작을 하지만 삼분의 일쯤 작품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등장인물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살아있는 작품이 되려면 그쯤 진행되었을 때 인물들이 스스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작가의 손끝을 떠나서도 스스로 행동을 정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작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치를 생산하기도 하며 역시 작가가 미리 예측하지 못했던 영역까지 가기도 한다.그러나 삼분의 일쯤 나아갔는데도 인물들이 살아 움직여 주지 않을 경우가 있다.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얘기다. 그때라도 처음으로 돌아가 시작을 달리 하거나 육화 되지 않은 것이라면 쓰기를 미루어 더 발효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지 않고 거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끝까지 밀고 나가본들 힘만 더 들뿐 끝까지 완성이 되질 않는다.
요즘 사회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새만금 개발문제나 교육부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두 번째 세 번째 단추도 엉망으로 끼워질 뿐 아니라 마지막 단추는 채울 곳이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충분한 검토와 준비 없이 즉흥적인 공약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일들이 뒤늦게 일으키는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나는 새만금을 살리자는 환경운동가들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당연한 일을 구호처럼 외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조차 했다. 더구나 매년 쌀 수매 가격이 낮아서 농민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생명의 원천이랄 수 있는 갯벌을 왜 농지로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아하기 짝이 없었다.
한번은 정읍에 있는 부모에게 갔다가 자동차에 두 분을 모시고 부안 채석강에 가보게 되었다.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곳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꽃살 무늬가 애잔한 내소사에도 들러보고 바지락죽도 먹어보고 아름다운 바닷길을 드라이브할 생각도 있었다. 그러다가 만난 새만금 방조제에 나는 그만 모든 흥을 잃어버리고 전율했다.
넘실넘실 출렁거리는 푸른 바닷물을 턱하니 가로막고 서 있는 그 방조제의 어마어마한 규모 앞에 서 보라. 누군들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지 않겠는지. 무슨 재앙 덩어리처럼 흐르는 물을 막고 서 있는 방조제는 자동차로 족히 십분을 달려도 저 끝에 다다르질 못했다. 차를 세워놓고 방조제에 올라가 보았다. 더는 자연스럽게 흘러가질 못하고 인간이 세워놓은 시멘트 둑에 철썩 부딪혔다가 세차게 밀려나는 물살에 내 혼이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더는 흐르지 못하고 시퍼렇게 갇혀있는 바닷물이 두려웠고 그 물을 가로막기 위해 그 거대한 방조제를 세운 인간의 힘도 무서웠다. 그 정도로 진척이 된 줄도 몰랐거니와 간접적으로 듣거나 지면에서 보거나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될 때까지 새만금 개발의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그 다음에 일었다. 방조제 앞에 서 있는 내가 얼마나 나약하던지 그 지방 도민으로 살고 있는 부모의 마음과는 달리 새만금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에 깊이 동조하던 마음까지 그만 무기력해졌던 것이다.
이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를 대체 어찌 한단 말인가. 이렇게 진행되도록 우리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최근에 삼보일배의 감동적인 소식을 들으면서도 역시 마음 한 켠이 답답했던 것은 눈앞에 그 거대한 방조제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개인의 소소한 실패에 있어서도 치러야 하는 대가가 만만찮은 법인데 국가정책에 의한 실패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게 차라리 나은 일에 환산할 수 없는 돈과 시간을 쏟아 부었을 걸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넘어서 분노가 치민다. 이렇게 눈에 드러난 문제들 말고도 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첫 단추에 의해서 계속 잘못 끼워지고 있을지를 생각해 보라.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신 경 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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