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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62>시인 고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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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62>시인 고형렬

입력
2003.06.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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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世事)를 한 방으로 해결하는 문학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문학은 확답을 방해하는 장르인지 모른다. 확신의 저쪽에 있는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지향으로 문학은 늘 '문제'가 된다. 그러기에 모든 비천한 우리네 삶이 시로 바라보일 때 발표는 공양에 준하는 것이다. 그때 밀실의 창작은 생의 즐거움과 보시가 된다. 때로는 시가 낯을 씻고 다가올 때가 있다. 진정에 가까운 무엇이 다시 정화되어 찾아오는 개심 같은 것이다. 다 써먹어 닳아버린 모서리가 아니라 새로운 잎사귀들과 처음 하늘에서 뿌려대는 빗줄기처럼. 어둠 속의 한 공가(空家)의 존재 이유를 모르게 될 때 시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곤 했던 것처럼.1974년 눈 내리던 날, 나는 강원 고성의 분단면인 현내면에서 면서기 생활을 시작했다. '장자(莊子)'로 시인이 된 것이 1979년이었으니 24년 전이다. 1985년에 나무계단이 삐꺽대는 청사에서 '대청봉(大靑峯) 수박밭'을 첫 시집으로 간행했고, 최근엔 '김포 운호가든집에서'를 내놓았으니 그 거리가 멀다. 나는 변했고 내 시는 시집들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얼마 전 한 평론가가 "대청봉에서 김포까지 왔다"는 엽서를 보내주어 내 문학의 궤적을 살짝 엿보는 기회를 가졌는데 그건 하나의 뱀이 몸을 틀며 지나간 듯한 보잘 것 없는 흔적이었다.

나의 모체와 지체는 아직도 설악 동쪽에 남아 있다.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서울 도심을 드나들지만 나는 여전히 서울에 도착하지 못했다. 적응하지 못한 것인가. 부러 도착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작용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상실감 혹은 미도착 현상이 묻혀 찾을 수 없게 될까 두려워지기도 한다. 긁으면 가려워지는 것처럼 그곳은 불편해도 없어선 안 되는, 근원에 닿게 하는 줄기 같은 것. 거기서 시가 나오는 것 같다.

어느 세월 동안은 안 가겠다던 백두산을 보고 온 뒤, 나는 늘 한 작은 얼굴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 얼굴은 상하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언덕길을 올라온다. 헉헉거리는 입술이 지열을 피워내는 아스팔트에 닿을 듯하다. 무릎이 꺾어질 듯 휘청거린다.

얼마 전 주인이 그에게 마차를 하나 목에 걸어주었을 것이다. 나무기둥에 돼지 갈비짝이 내걸린 늦여름 장터를 지나 시오리쯤 되는 언덕을 내려가는데, 길 끝에 한 점이 반짝였다. 딸깍딸깍 발굽소리가 들렸다. 당나귀를 하나의 점으로 바라볼 때 나는 원경으로만 보이는 그의 노동의 소리가 얼마나 큰지를 몰랐다. 더위에 헉헉거리는 소년 당나귀의 뺨에 곧 방울이 달릴 것이다. 당나귀는 길을 가면서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지만 정신을 차리라고 위로받고 채찍질 당할 것이다. 문학의 길에서 그런 광경이 눈부시게 비춰지는 것은 나만의 불행도 기쁨도 아닐 것이다. 나는 또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나를 보았다.

최근 해 지는 강화도 쪽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요 몇 년 간의 내 모습이다. 어느날 나는 한 여인을 데리고 김포 하성면 사무소 남쪽의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마음을 놓아본 적이 없는 나는 내가 너무 긴장하고 경계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꽃무늬 벽지 밑에 토벽이 드러난 5호실에서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란 인성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도 버려질 수 없고 비하될 수 없는 '성품'이었다. 오랜만에 바람이 부는 기미를 창을 보고 알았고, 여자의 아름다움을 눈앞에 앉혀놓고 보았다. 나는 너무나 지쳐서 먼 방에 돌아와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나를 보았다. 낯선 사람의 대접을 받으면서 나는 스스로가 방치되어 있는 정황을 인내하는 내면을 그곳에 숨겨놓을 수 있었다. 그가 북쪽 여자가 아니더라도 운호가든집에 지친 한 영혼이 찾아와 두리번거리고 앉았다가 그냥 갔다는 사실이 내겐 중요했다.

가 닿지 못하는 곳에 '나'가 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곳은 옌볜보다 먼 티벳보다 높은, 해가 제일 일찍 떠오르는 추운 겨울 상청(上靑)의 겨울눈일 수 있다. 아니면 구랍에 안막을 가리는 강화 갯벌의 일몰 속 농게일지 모른다. 마지막 반조(返照)를 생각하면 세상을 다 보여주어도 표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나는 정말로 인식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니까 나는 바람이 되어 공룡능선을 마구 덮고 때리는 꿈을 꾼다. 광기는 아니다. 생의 덧없음을 부정하려고 정신을 뜀박질시키며 육체성을 획득하려고 했지만 우리에겐 초월하지 못한 현실이 있다. 그 벽을 나는 1980년대 중반 슬쩍 넘어가버린 적이 있지만 그 사실만이 지금 나에게 위로가 되고 있을 뿐이다.

나는 30여년 전 대진 앞바다에서 처음으로 금강산을 두 눈으로 보았다. 여명이 깨어나는 새벽, 어로저지선까지 나갔다가 아침해가 시퍼런 경계의 바다에서 불쑥 떠올라 나의 어둠을 깨뜨렸다. 나는 추위 속에서 놀랐다. 그날의 첫 햇살을 받는 금강산의 아침 모습은 내 생에서 가장 쩌릿한 전율의 광경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일체의 추억이 없는 초산이나 사리원을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환멸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시'를 쓰고 싶었다. 그것은 부정한 세계에 대한 등돌리기이며 부당한 권력을 소외시키려는 시적 꿈이었을 것이다. 한쪽만 선택한다는 것은 해방공간부터 시작하여 오늘의 우리들에게까지 한계임이 명백하다.

나는 늘 경계를 넘고 싶어했다. 한 후배 시인이 사북에서 서울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으면서 나는 좌절을 맛보았다. 광산촌을 형상하고 싶었던 의욕은 나로선 커다란 뒤척임이었다. 화절령 일대를 돌아다니며 노인들과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생을 뻔질나게 녹음해 오곤 했다. 그때 잊을 수 없는 설날 아침의 한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얼어붙은 제방 밑에서 한 여자가 아이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순간에 일어난 일에 나는 놀랐다. 아이는 울음을 뚝 그쳤다. 등에 또 한 아이를 업고 걸어가는 그 부인을 바라보면서 나는 울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눈바람이 우웅 산을 에워싸는 소리를 냈다. 세상이 너무나 춥고 눈부셨던 사북이었다.

그후 나는 광산촌을 지나쳤다. 어느날 고한역에서 옆 사람이 놓고 내린 신문을 읽다가 눈이 열렸다. 또다른 밀행과 월경이 보였다. 가평리 양양내수면연구소의 가동 소식과 함께 치어들의 방류가 시작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나는 이듬해 들여다본 그 방축장의 치어들만큼 기뻤다. 십여 년 만에 '은빛 물고기'를 '내일을 여는 작가'에 연재를 하게 되었다. 그건 해안으로 파도치며 북으로 흘러가고자 했던 꿈이었다. 연어를 통하여 내가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도 나는 성냥개비만한 치어들이 베링해까지 갔다가 다 자라서 2, 3년 만에 산란회귀하는 그들의 놀라운 기억력과 뜨거운 죽음에 탄복한다. 그들의 일생을 그리면서 나는 은연중 내가 살아가고 있는 파편화와 상승과 동반 상실의 복잡한 시대에 이 글 한 토막을 썼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다만 현실 속에 갇혀 있어도 우리 마음의 초현실성을 돕고 싶은 것이 원이었다면 그 시대 속에서 내 시적 꿈이 큰 오류를 범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작년, 나는 우연히 백양사에서 다비식을 보았다. 여름문학교실에서 "나는 긴장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고 이어 "문학에서 긴장이 작위성을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긴장 자체를 싫어한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산책길에 나섰다. 입을 벌린 장작을 부수면서 불은 한 인간의 가슴속으로 죽어라고 파고들었다. 그건 마치 아이와 여자처럼 보였다. 고랑대로 받치고 있던 불구덩이가 무너지면서 불티가 하늘로 튀었다. 내일 오후까지는 가야 잦아질 거라는 한줌 불길을 저만치 무심하게 두고 저녁을 만들고 있는 산중은 무긴장의 바다였다. 붉고 노란색의 붕어들이 유영하는 연못 저쪽은 활활거리는데 쉼은 고요하고 편안했다. 그 길에서 나는 궁극적으론 '나'란 아상이 없음을 보았다. 하여, 그가 누구이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사물들 사이에 지나가는 자성(自性)의 그림자를 보고 싶다. 나는 하나의 지우개처럼 닳아져 갈 것이며, 나는 아직은 불이 들어와 있는 전등 같은 존재일 터. 그래도 시가 세상에 던지는 꽃 한 송이라면 디자인을 잘해야 하는 양식이며 구도의 길이기도 하다. 일목요연한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 것이 문학일지 모른다. 나는 한숨과 한계가 보이는, 가로수 잎이 반짝이는 길을 내다본다. 그 끝에 무엇이 그슬리고 있는지. 어딘가를 관통해 길처럼 드러눕거나 산 끝 바위에 올라타고 싶은 것, 이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 연보

1954년 전남 해남 출생 1979년 '현대문학'에 시 '장자(莊子)' 발표 등단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 등 역임·현재 창작과비평사 기획위원, 계간 '시평' 편집위원 시집 '대청봉 수박밭' '해청' '사진리 대설' '성에꽃 눈부처'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산문집 '은빛물고기' '시 속에 꽃이 피었네' 동시집 '빵 들고 자는 언니' 등 지훈상(2003)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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