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건강 식품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김정문(76) 회장은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청년시절부터 자기집을 못 찾아 헤매기 일쑤였다. 지금도 매일 타는 자동차의 색깔이나 차종조차 잘 모른다. 그 흔한 라면 하나 손수 못 끓이는 것은 물론, 비행기나 지하철을 잘못 탄 적은 부지기수다. 기억력이 모자라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팔순을 앞둔 고령에도 불구하고 50년이 지난 영화의 에필로그를 토씨 하나까지 틀리지 않고 읊을 정도의 탁월한 기억력을 자랑한다. 청년시절 탐독한 BC 2세기 천체학자의 학설 원리를 아직도 정확히 설명한다. 경남 통영 출신으로는 처음 서울사범대의 전신인 경성사범학교에 수석 합격한 것도 그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예다. 그래서 김 회장은 스스로를 "우월한 기억력과 집중력, 그리고 멍청함이 공존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김 회장은 어려서부터 병약했다. 그가 알로에 사업에 뛰어든 계기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소한 체격의 김 회장은 경성사범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4세 때 폐결핵 진단을 받고 휴학했다. 폐결핵뿐 아니었다. 그는 위궤양, 위하수, 만성 중증변비, 류머티즘 관절염, 피부병 등 10여 개 질병에 시달렸다. 가정을 돌보지 않은 무책임한 아버지와 함께 한 그의 어린시절은 가난과 병마와의 싸움으로 점철돼 있다.
"내 어린 시절은 술만 취하면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배가 쓰리도록 고팠던 기억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아마 생활력이 강했던 어머니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1945년 폐결핵이 3기까지 악화했다. 생명까지 위협받는 상황이었지만 같은 교회에 다니던 약사에게서 8개월간 칼슘 주사 치료를 받으면서 폐결핵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자연의학의 신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기력을 회복한 김 회장은 통영수산학교와 고려신학교(장로회신학교 전신)를 거쳐 동아대에 편입했다. 이 시절 전국기독학생연합회에 가담해 한 때 학생운동을 하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이화동 판자집에서 외국 서적을 수입 판매하는 일을 시작으로 노트공장, 제일생명보험 지분 인수 등 각종 사업에 손을 댔다. 30대 이후에는 원예사업에도 뛰어들어 사계절 국화를 개발하고, 국내 최초로 파인애플, 바나나 등 열대과일을 들여오는 일도 했다.
"사업은 비교적 잘 됐지만 마흔 아홉 되던 해 무려 13가지 병으로 시달렸습니다. 의사가 '두 달 이상 살기 힘드니 천국 갈 준비나 하라'고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약물 중독까지 걸린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알로에와의 만남이 시작된 거죠."
김회장은 1975년 큰 회사의 농장 관리인으로 있던 초등학교 친구에게서 알로에를 소개 받았다.
이를 기점으로 그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김 회장은 '아보레센스'라는 알로에 생잎을 먹기 시작하면서 33년을 끈질기게 따라다닌 중증 변비에서 해방됐다. 김 회장은 이후 '사포나리아', '베라' 등 다른 알로에들을 찾아 냈고, 이를 통해 위장병, 류마티즘, 피부병 등 앓고 있던 만성 질환을 모두 치료했다. 자연스럽게 알로에 보급과 대중화의 전도사로 변신했다.
알로에에 미친 김 회장은 3,500년 전 이집트 의서부터 20세기 소련 의사들의 임상보고서에 이르기까지 알로에에 관한 자료라면 무엇이든 모아들였다. 그런 노력 끝에 김 회장은 신비의 약초인 알로에 대량 재배에 성공했다.
하지만 1980년대 초 알로에의 효능이 일반에 알려질 즈음 돈벌이를 노린 수입업자와 재배 농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보건사회부 식품검사에서 허용치를 넘는 대장균이 적발되면서 알로에 사업은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다른 업자들과 달리 알로에에 관한 연구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강연을 통해 알로에의 이미지 제고에 나섰고 휴대와 복용이 간편한 분말 형태의 알로에를 개발, 시판하면서 재기에 성공했다. 김 회장은 건강식품 일변도에서 탈피, 화장품과 치료 분야로까지 알로에의 용도를 넓혀가며 김정문 알로에를 세계적인 알로에 전문기업으로 키웠다.
"알로에는 병마와 싸우며 죽음을 향해 가던 인생에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준 은인과 같은 존재입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하루하루 고통 속에 죽음의 공포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은 인생 동안 자연의학 연구를 통해 병마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바칠 것입니다." 80을 앞둔 건강식품 전도자의 다짐이다.
/송영웅 기자 herosong@hk.co.kr
● 김정문 회장은 누구
-1927년 경남 통영 출생
-1953년 동아대 졸업
-1954년 (주)신교사 대표
-1980년 (주)한국알로에의 집 설립·대표이사
-1983년 김정문알로에 연구소 설립
-1990년 (주)김정문알로에 법인전환·대표이사
-1992년 (주)푸른화장품 법인 설립·회장
-저서: '역사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끝없는 도전' 등
● 김정문알로에는 어떤 회사
(주)김정문알로에는 1975년 김정문 회장이 알로에 아보레센스를 보급하면서 태동해 90년 정식 법인으로 전환한 건강보조식품 전문업체. 알로에를 비롯해 키토산, 자라, 초유 등 자연식품을 주원료로 한 건강식품과 화장품, 이온정수기 등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600억원. 국내 알로에 시장의 30% 정도를 점유하고 있으며, 중국 일본 미국 호주 등으로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본사 직원은 150명이나 각 지역별로 5,000여명의 방문 판매사원이 있어 판촉 활동을 사실상 전담하고 있다. 제주에서 알로에를 재배해오다 2년 전부터 청정지역인 호주 등에서 원료를 들여오는 등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앞으로 중국, 일본 등에 대한 수출에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다.
내가 본 김정문
1951년 부산 피난 시절에 만난 이래 우리는 52년간 서로 하는 일은 달라도 늘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는 의리로 살아온 사나이다. 항상 확고한 민족관 아래 투철한 정의감과 애국심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왔다. 선배들과 한번 의리를 맺으면 변치 않았고 항상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념으로 살아왔다.
그는 항상 창조적인 삶을 추구해 왔다. 보존 계승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괴적인 사람도 있지만 김정문 회장은 아주 창조적인 사람이다. 40여년 전에 이미 열대지역에서만 자라던 화초와 식물들을 한국 땅에서 키워냈다.
국내 최초로 알로에를 대중화시키는 선봉적인 일도 해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창조적인 일이었다.
김 회장은 '오뚝이'에 비할 수 있는 인물이다. 창의적으로 시작한 사업이 망해 빈털터리가 된 적도 여러 번이었고, 몸이 약해 병사할 뻔한 적도 있었다. 삼풍백화점 참사 때는 아내와 자식까지 잃었다. 그는 보통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극복하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김 회장의 삶은 자기 자신이 아닌 민족공동체를 위해 살아온 인생이다. 그는 환상과도 같은 꿈을 안고 살아왔지만 아직 그 아름다운 꿈을 다 이루지는 못했다. 황혼기를 맞이하는 그가 뜻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되기를 나는 항상 기도 드리는 심정이다.
강 원 룡 (사)평화포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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