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광림(51·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장)은 참 결이 고운 사람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라서 요즘 더욱 인기를 끌고 있는 그의 연극 '날 보러 와요'에는 도입부에 이성복 시인의 시가 나온다. 그는 이성복 시인과 "대학 다닐 때는 친하게 지냈고" 시인의 시집이 나오면 꼭 서점에 가서 사본다고 했다. 그래서 연극에 등장한 걸 시인도 알고 있냐니까 전화로 이야기해줬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성복 시인은 연극을 보러 오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하다는 반응에 김광림은 서둘러 "대구 사니까 그렇겠지요"라며 빙그레 웃었다. 그가 쓰고 연출한 '날 보러와요'의 무대는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 화성이다. 영화와 달리 연극에는 피해자가 당한 엽기적인 상황이 상당히 축약됐는데 이것도 그의 결고움과 연관이 있다. 당시 화성에는 수사본부가 차려져 서울과 지방의 내로라하는 형사들이 모여들었고 취재진과 함께 복작댔다. 그런데 영화에 나오는 수사본부는 너무 단출하다. 영화의 출연자수는 무제한으로 가능한데도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단 네 명의 형사가 빈틈 하나 없이 상황을 이끌어가는 연극의 매력으로부터 영화가 달아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날보러 와요'는 실상 김광림이 꿈꾸는 이상적인 연극은 아니다. 서양식 '정통' 연극의 극작법을 가르치기 위해 시범삼아 쓴 작품이다. 96년 초연된 후 이번이 8차 공연인데 300여회 공연이 매번 매진이다. 영화는 서서히 관객이 줄고 있지만 연극은 인기몰이가 계속돼 연장공연을 추진중이다. 작품 한편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취재는 필수이고 "글은 배(腹)로 써야 한다"는 김광림의 극작론을 들어보자.―왜 제목이 '날 보러와요'인가.
"이 연극을 하면 범인이 보러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지었다."
―어떻게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작품화할 생각이 들었나.
"91년에 다른 연극('당신의 침묵')을 할 때인데 음악을 맡은 이동준이 술을 마시면서 이걸 연극으로 하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더라. 범인은 화성, 저 우주 화성 말이다, 에서 왔구요 하면서. 그 친구가 억울하게 생긴 얼굴이어서 '용의자는 계속 네가 들어오고 경찰은 계속 그걸 다른 사람인 줄 알면 무지 재미있을 거'라고 말을 받았는데 생각해보니 점점 연극이 될 것 같았다.(실제로 연극에 나오는 용의자 3명과 진짜 범인을 모두 같은 배우가 연기한다.) 95년 석달동안 취재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96년이면 공권력에 대한 반감이 여전할 때인데 형사들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연우무대 출신이고 대학 때는 데모도 해서 공권력에 비판적일 것 같은데…
"작품에 경찰의 무능도 많이 담았는데 관객들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용의자 세 명이 모두 똑 같은 사람인데 경찰이 모른다거나 첫번째 용의자가 관음증 환자인데 사고를 깊게 한다는 김형사조차 그걸 무시한다는 점, 조형사의 폭력성 등이 곳곳에 들어가 있다. 치안본부장이 직접 수사한다고 하면서 현장을 망쳐놓은 것도 실제 있었던 일이고 작품에도 묘사돼 있다.
그런데 막상 취재해보니 형사들이 너무 고생하더라. 그런 실상이 작품에 담겼다. 10차 사건 가운데 두번은 범인을 잡았는데 형사들이 정말 엄청 고생을 했다. 나도 유학(UCLA 연극과 대학원)가기 전에 쓴 작품은 사회비판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연극이 사회운동이라고는 생각 않는다. 연극은 예술이다."
―작품을 쓰기 위해 매번 취재를 하나.
"취재를 해서 작품을 만드는 메소드(희곡 작법)는 이미 미국에서는 20세기초부터 자리잡았다. 처음 서울예대(1990∼1994) 극작과에 취직을 해서 이 같은 메소드에 맞춰 2년 교육과정을 개발했다. 연극원으로 옮겨오면서(1994년) 4년 과정으로 심화시켰다. 1, 2학년 때는 연극의 기본과 고전을 가르친 뒤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극작을 가르치는데 오감훈련을 가장 먼저 시킨다. 이때 만나는 사람들을 관찰해서 시간 공간 인물 뱅크를 만들게 한다. 취재도 필수이다. 그리고 글이 머리도 가슴도 아닌 배에서 나오도록 가르친다. 그걸 토대로 처음에는 한 씬(scene)을, 그 다음에는 단막극을, 4학년에 가면 제대로 된 희곡 두 편을 쓰게 한다. 한 편은 배운대로, 한 편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쓰게 한다."
―가슴도 아니고 배로 글을 쓴다는 것이 가능한가.
"상황을 거리를 두고 관찰하듯이 쓰면 머리로 쓰는 거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자기를 당사자로 느끼면 배에서 아릿한 느낌이 온다. 모든 역할을 그런 느낌으로 써가는 것이 바로 배로 쓰는 것이다. 연기자들 역시 그 대상이 될 때 연기를 잘한다. 그러나 대상에서 떨어져 나올 줄도 알아야 한다. 가령 우는 장면을 한다고 해서 진짜로 울면 연기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작품도 당사자로 느낀다고 해서 관객이 다같이 공감해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현장 접근이 봉쇄된 상황에서) 형사들이 현장의 흙을 퍼다가 돋보기로 뒤져서 간신히 털을 찾은 뒤 '저거 그 여자 애(피해자) 꺼면 어떡하죠' '걘 아직 안 났어. 아까 내가 봤어'하는데 매번 폭소가 터지더라. 이 장면은 열 네살 밖에 안된 어린애가 피해자가 된 상황을 형사가 된 심정으로 분노하면서 썼는데,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있다보니 유머로 받아들이더라."
―취재는 어떤 식으로 했나.
"처음에는 신문과 잡지, 관련 책을 읽었다. 화성의 현장에도 세 번이나 갔다. 피해자 가족들은 나서려고 하지 않아 주로 수사한 형사들을 만났다. 지휘했던 검사를 고교 동창 통해 소개받았더니 그 검사가 당시 10개 사건 수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한 수사반장을 소개해주었다. 처음 그 형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나중에 내가 ROTC 3년 후배라는 걸 알고부터는 이야기를 잘해주었다."
―영화와 달리 연극에는 80년대적인 상황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80년대 화성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전형적인 농촌지역인데 산업화로 서울이 팽창하면서 서울 변두리의 공장들이 많이 옮겨갔다. 외지인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전형적인 농촌에 이질적인 요소가 생겨났다. 그러나 화성만의 문제는 아니고 같은 상황이라면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연극에서 다루고 싶은 주제는 진실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처음에는 아예 진실의 부재를 주제로 작품을 썼는데, 사건은 있는데 범죄가 없다는 설정은 아니다 싶어서 고르기아스의 철학에 따라 진실은 있는가, 있다면 인간은 알 수 있는가로 주제를 바꾸었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이며 배우이기도 한데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원력이 없어져서 요즘 잘 쓰지 못한다. '날보러 와요'는 전형적인 서양 연극인데 우리 양식이 아니기 때문에 어색한 점이 많다. 우리가 '햄릿'을 연기한다고 하지만 서양의 형식은 서양인들이 하는 걸 따라가지 못한다. 그리고 서양은 벌써 이 같은 근대 연극을 넘어서서 새로운 양식을 한다. 우리가 이런 연극에 빠져 있으면 평생 서양만 뒤쫓게 된다. 우리만의 연희 양식을 개발해야 한다. 일본에는 노나 가부끼가 있고 중국에는 경극이 있는데 이건 원래부터 있던 전통이라기보다는 근대화 시기에 만들어낸 전통이다. 그런데 우리만 이런 연희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리 전통에서는 줄거리나 주제보다 음악이 중요하고 스펙터클한 볼거리가 중요하다. 그런 것을 살리는 연극양식을 만드는 게 과제이다. 지난해 공연한 '우투리'는 대사는 전통 박자를 살리고 움직임은 기천도에서 따와 이런 양식을 실험해본 것이다. 올해는 움직임을 양주별산대로 바꿔서 9, 10월께 재공연을 하려고 한다."
이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이번이 8차… 조금씩 진화된 "날보러 와요"
김광림씨가 희곡을 처음 완성한 때는 1995년 12월. 처음 쓴 작품은 2시간 30분 분량이었다. 40분을 들어내고 96년 2월에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초연됐다.
수사반장이 두번이나 바뀐 후 서울서 자원한 김 반장, 치안본부에서 내려온 서울대 출신의 시 쓰는 김형사, 무술 9단으로 용의자를 치도곤해서 억지 자백을 받아내는 조형사, 시골 토박이로 땅부자인 박형사와 지방신문 여기자가 사건을 추적하는 가운데 김형사를 흠모하는 시골다방 미스김의 로맨스가 섞인다. 정신이상자, 변태, 지능형의 용의자가 잡혀와 수사를 받지만 결국에는 누구도 범인으로 밝혀지지 않고, 충격을 받은 김반장은 풍을 맞아 은퇴하고 김형사는 정신이상이 된다. 전체적인 골격은 비극적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 때문에 거의 매분마다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진다.
연극은 8차례 공연되며 아주 약간씩 변화해왔다.
가령 단순무식한 조형사를 정보통으로 쓰던 여기자가 서울로 떠나기 직전 그와 키스를 나누는 장면은 조형사가 주도한 단 한번의 키스에 3회차부터는 여자가 주도한 두번째 키스가 추가된다. '정을 떼는 키스'라는 것이 작가의 해석이다.
5월8일 시작한 8회차에서 바뀐 것도 있다. 최초 용의자인 정신이상자의 횡설수설은 살인현장 목격이었다는 설정이 추가됐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고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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