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비리 의혹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하던 2002년 1월29일 아침 7시30분, 최경원(崔慶元) 법무장관은 이상주(李相周)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최 장관은 자신이 물러나게 됐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날 개각이 예고돼 있었기 때문에 비서실장의 전화는 곧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이 실장은 한참 머뭇거리고 나서 "최 장관, 정말 미안하게 됐다. 원래는 이게 아니었는데…"라며 교체를 통보했다. 최 장관은 무척 미안해 하는 이 실장에게 "괜찮다"고 말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아니었다'는 이 실장의 말도 그렇지만, 28일 저녁 8시 청와대의 한 고위인사로부터 유임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밤 늦게 DJ를 설득, 개각 명단에 최 장관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 A씨의 얘기.
"신승남(愼承男) 검찰총장이 동생의 게이트 연루로 낙마한 후 청와대는 비호남(TK) 출신인 이명재씨를 총장에 임명해놓고 걱정이 적지 않았다. 수사의 칼날이 홍업(弘業), 홍걸(弘傑)씨를 겨냥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런 걱정이 경기고 출신인 최경원 장관을 퇴진하게 했고 정권 초에 물러났던 전북 익산 출신인 송정호(宋正鎬) 전 광주고검장을 장관으로 다시 발탁하게 했다. 송정호의 인사권으로 이명재의 수사권을 견제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 때 청와대 밖에 있었던 박지원(朴智元)씨, 김학재(金鶴在) 민정수석 등이 견제의 논리를 대통령에 건의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권력 누수가 시작된 당시, 인사권으로 수사권을 통제하기는 역부족이었고 송 장관 자신이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 실장의 통보를 받고 최 장관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검찰 인사안을 서랍 안에 넣고 퇴임사를 쓰기 시작했다. 최 장관이 아쉽게 접었던 인사안은 이명재 총장과 상의해 마련한 것이었다.
최 전 장관의 회고. "그 때 제대로 검찰 인사를 해보려고 했다. 이명재 총장과 상의했다. 나는 이 총장에게 '우리나라가 DJ같은 민주인권 지도자를 갖기 어렵다. 세계가 한 수 접어주는 지도자를 다시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보라. 얼마나 이미지가 추락했는가. 다 검찰 때문이다. 특히 인사가 문제다. 우리가 제대로 인사를 해 검찰을 바로 세우자. 그래야 대통령이 물러날 때 명예로울 것이다'고 말했다. 이 총장도 그러자고 했다. 나와 이 총장이 머리를 맞대니 인사안은 순식간에 짜졌다. 비리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게이트를 초래했던 검사들을 좌천시키고 수사력있는 검사들을 요직에 발탁하는 내용이었다."
최 장관은 이 인사안을 DJ에 보고도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최 장관은 검찰 인사안을 보고하기 위해 시간을 잡아달라고 김학재 수석에 부탁했었다. 그러나 김 수석은 "대통령의 일정이 너무 빡빡해 보고 시간을 잡기가 쉽지 않다"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개각이 이루어진 것이다.
김 수석의 이런 태도 때문에 검찰 주변에서는 "청와대가 최 장관의 인사안에 반대했다", "최 장관이 인사안 때문에 낙마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런 풍설들은 일선 검사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사실은 아니었다. 일단 최 장관은 청와대에 검찰 인사안을 보고한 적이 없다. 청와대가 그 내용을 미리 짐작하고 견제했다면 모르지만 적어도 인사안에 대한 불만으로 최 장관을 경질한 것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믿을 만한 사람'을 법무장관에 앉혀 검찰 수사를 어느 정도 제어하겠다는 견제론이 최 장관 교체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김 수석의 거취가 최 장관의 교체와 어느 정도 얽혀 있었다. 당시 검찰 간부나 청와대 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김 수석이 대검 차장으로 가고자 했고 그로 인해 검찰 인사구도가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이 총장 등장 이후 김 수석은 최 장관에 전화를 걸어 친정(검찰)으로 복귀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검찰 기수로는 최 장관(사시 8회)이 김 수석(13회)의 선배였지만 서울 법대 동기로 사석에서는 친구였기 때문에 속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최 장관은 친구인 김 수석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최 장관은 "청와대에서 검찰 수사의 지휘계통으로 바로 오면 문제가 된다"며 반대했다. 김 수석은 동의하지 않았다. 김 수석은 대선 국면에서 검찰 지휘부가 대통령과 연이 닿지 않는 인물들로만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박지원 등 실세들도 그랬다. 검찰이 임기 말 힘 빠진 권력을 향해 수사의 칼날을 가혹하게 휘두를 수 있다고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 수석은 개각을 앞두고 견제의 논리를 DJ에 설명했고 DJ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김 수석은 최 장관이 물러나고 송 장관이 임명된 이후에도 대검 차장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한직인 법무연수원장으로 가야 했다. 각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았고 한나라당과 언론도 무차별 공격을 하고 있어 송 장관도 김 수석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다.
송정호 전 장관의 증언.
"김학재 수석이 직접 자기 희망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이상주 실장 후임인 전윤철(田允喆) 실장이 검토해달라는 의견을 전해왔다. 장관으로서 민정수석이 친정에 돌아올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검토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과거 사례를 쭉 보았다. 6공 때 정구영(鄭銶永)씨는 총장으로, YS 정부 때 김유후(金有厚)씨는 서울고검장으로 왔고 DJ 정부의 신광옥(辛光玉)씨는 차관으로 나왔다. 김학재씨는 차관으로 있다가 청와대로 갔으니 다시 차관을 맡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수사 지휘라인으로 가기에는 당시 여론이 너무 험악했다. 고민을 하다가 법무연수원장이 합당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송 장관은 김 수석 대신 전남 광양 출신인 김승규(金昇圭) 차관을 대검 차장에 임명, 청와대의 걱정을 조금 덜어주었다. '김승규 차장'은 최경원 장관의 인사안에도 들어있었다. 장관만 바뀌었을 뿐 대검 차장은 원래대로 된 셈이었다. 물론 송 장관이 전임 장관의 인사안을 참조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 여건에서는 '김학재 차장' 안을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서울지검장을 놓고도 막판 실랑이가 있었다. 최 장관의 인사안에서는 특수 수사통인 경남 하동 출신의 정홍원(鄭烘原) 광주지검장이 서울지검장으로 돼있었고 송 장관 때도 이명재 총장 등이 정홍원을 서울지검장으로 택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목포 인맥들이 전남 장흥 출신인 정충수(鄭忠秀) 수원지검장을 밀면서 인사구도가 흔들리기 시작, 결국 경기 출신인 이범관(李範觀) 인천지검장이 어부지리를 얻게 된다.
송 전 장관의 얘기.
"김학재를 대검 차장에 시키지 않으면서 PK 출신을 서울지검장에 앉히면 권력 핵심부가 거부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점을 고려, 지역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무난한 이범관을 시켰다. 이범관은 국민의 정부 초기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내 나름대로 신뢰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청와대가 검찰에 대한 영향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호남 출신을 법무장관과 대검 차장에 포진시켰지만 대통령의 아들들은 구속을 면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홍업, 홍걸씨에 대한 수사의 강도가 셌고 나중에는 송 장관이 청와대의 선처 요청을 공개, 청와대는 망신을 당해야 했다.
이에 대한 최경원 전 장관의 아쉬움 섞인 얘기.
"대통령의 두 아들이 구속되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가슴이 아팠다. 한편으로는 1·29 개각 때 물러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장관으로 남아 있었다면 두 아들 모두 구속하는 것을 막아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다. 과거부터 형제나 부자를 한꺼번에 구속하지 않는 게 검찰의 관례였다. 특히 홍걸은 최규선에게 이용당한 것이어서 정상을 참작할 수도 있었다.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호남 장관이 설득하면 오해를 받지만 내가 이명재 총장과 검사들을 설득하면 그런 오해는 없었을 것이다."
DJ 정부 임기 말의 검찰 인사 갈등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당시 검찰의 대통령 아들 구속이 명예회복을 위한 몸부림의 결과가 아니라 힘 빠진 권력을 향한 칼질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실제 당시 청와대는 검찰 간부 상당수가 대세를 장악하고 있던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에 줄을 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인식이 진실에 접근하든, 터무니없는 피해의식이든 간에, 이제 정치 권력과 검찰은 과거의 관행 속에 안주하기는 힘들게 됐다. 물론 지금도 지연, 학연 등 연고에 따른 인사, 권력에 줄을 대려는 검사들이 있다.
그러나 DJ 정부 말기에 드러난 검찰의 추락과 혼돈, 구속사태는 정치권이나 검찰 모두에게 교훈이 되고 있다.
/이영성기자 leey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