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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일그러진 신용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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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일그러진 신용사회

입력
2003.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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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불량자 300만명. 요즘 세태를 그려보자면 있는 자는 남의 돈을 슬쩍 받아서 살고, 없는 자는 남의 돈을 빌려서 사는 꼴이다. 앞은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수수하는 뇌물을 말함이요, 뒤는 카드 빚을 칭함이다. 전자도 그렇지만 후자의 심각성은 신문 펼치기를 두렵게 할 정도다. 카드 빚 독촉에 자살하는 과중채무자나 보호자, 카드 빚 때문에 절도, 강도, 인신매매, 살인 등 범죄도 주저하지 않는 20·30대 범죄자들….'빚으로 살라고 권하는 사회', '외상이 미덕인 사회', '죽음을 부르는 신용카드'. 이는 일그러진 한국의 신용사회를 꼬집어 표현하는 말들이다. 발급된 신용카드 수와 카드 매출규모를 보면 가히 한국을 신용사회로 부를 만하다. 지갑에 현금 한푼 없어도 몇 장의 신용카드가 항상 대기 중이어서 훗날 어떻게 될지언정 허울좋게 카드를 빼는 게 우리의 일상적인 소비 행태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지출 없이도 반대급부를 얻게 하는 신용카드의 마법에 현혹돼 충동적 소비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신용카드 이용은 소득원 노출에 따른 투명과세를 가능하게 하여 지하경제나 탈세, 부정부패 등 후진국형 경제사회현상을 제거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적극 권장해야 한다. 또한 신용카드는 취약한 소비자금융시장을 보완하기도 하는데 소비자들은 현금서비스나 카드론 등을 통해서 높은 은행문턱을 넘지 않고도 신용 하나만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어 신용사회의 필수품이다.

그러나 국내 신용카드산업의 급성장 이면에는 과소비유발, 신용불량자의 양산, 신용카드 관련 범죄의 증가, 신용카드를 이용한 현금대출비중의 기형적 팽창 등 수많은 사회경제적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무담보, 무보증으로 쉽게 현금을 대출 받거나 현금 없이도 할부구매가 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의 소득수준을 넘어서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과소비가 일반화되어 있으며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 등으로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는 등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이미 지난 4월 말에 신용불량자가 경제활동인구의 14%에 해당하는 30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 증가추세도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고 20· 30대 신용불량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증하고 있다니 또 외환위기가 닥치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가계와 개인의 부실확산은 국가 경제적인 측면 외에 범죄사회학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을 예고한다. 신용카드 연체대금 때문에 살인, 강도 등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고 신용카드 연체대금 때문에 사용자 본인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신용카드는 현금 없는 신용구매수단, 예상되는 미래의 소득으로 현재의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죽음과 범죄를 연상케 하는 애물단지이며, 개인파산과 가정파탄의 주범이 되어 버렸다.

이와 같은 신용카드의 오·남용으로 인한 역기능은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범죄학적 및 형사정책적 측면에서도 효과적인 대책마련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제2의 화폐로 자리를 굳힌 신용카드의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을 최대화하는 제도적 개선책과 범죄예방대책이 필요하다. 대통령도 참여정부 출범 100일을 되돌아보며 국정 중심을 경제안정, 그 중에서도 서민생활 안정에 두고 모든 노력을 쏟겠다며 카드채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신용불량자 신용회복지원제도의 실효성 향상, 엄격한 발급기준적용, 불법 채권추심행위 근절 등은 단기적으로 시급한 대책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용사회를 구축하고 카드관련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와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올바른 소비생활을 가르치고 경험하게 하며, 대학생들이나 예비취업자들에게는 신용관리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다.

하 태 훈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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