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SK 와이번스는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케한다. 땟국물처럼 들어붙어있는 만년 꼴찌의 팀 컬러와 무명선수 출신의 초보감독이 지키는 덕아웃에 홈런타자 하나 없는 배팅오더. 이들이 올 시즌 대형사고를 치고 있다. 창단 3년만의 첫 정규시즌 단독 선두다. 거칠 것이 없는 상승세다. 그 신바람의 중심에 조범현 감독(43)이 있다. 그는 치밀한 데이터 야구와 보이지않는 카리스마로 자신의 사령탑 취임을 흘겨보던 시선을 향해 통쾌한 조소를 되돌려 보내고 있다. 지난달 28일 오후 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기자는 스타선수=스타감독의 공식을 깨뜨리고 있는 왕초보 감독과 마주 앉았다. 그는 구수한 인상에 선한 눈길을 갖고 있었다.―창단 후 처음으로 1위를 달리는 소감은.
"현재 1이라는 숫자는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팀이 프런트와 선수 모두가 똘똘 뭉쳐 있다는 것이 기분이 좋다. 20년 이상 야구판에 있으면서 요즘처럼 좋은 분위기는 처음이다. 야구 할 맛이 난다."
―처음 해보는 감독인데.
"감독이 되기 전에는 스케일이 크고, 화려하고, 팬들이 좋아하는 재미있는 야구를 만들어내는 것을 꿈꿨는데 막상 해보니 야구란게 정말 만만치 않다는걸 느끼고 있다."
―야구 감독으로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야구 감독이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2달동안 해보니 가장 힘든 게 게임 전에 준비하고 나가지만 막상 경기에 들어가면 순간순간 한 장면에 신경쓰다 보니 당초의 전체 구상을 잃게 된다는 점이다. 타이밍을 놓치고 끝나고 나서야 항상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다."
―김성근 감독의 데이터 야구를 이어받았다는데.
"3∼4명의 전력분석팀을 구성해서 상대팀 투타분석을 전담시킨다. 1차분석 후 선수와 개별 면담을 하고, 비디오 분석도 하고 또 전략회의로 이어진다. 상대 타자를 연구할 때는 두 다리의 스탠스에 따라 투수들에게 어떤 볼이 약한지, 이런 유형의 타자는 어떻게 볼배합을 해야 되는지를 선수들에게 지도한다."
―SK의 힘은 어디서 나오나.
"지난해 12월 감독에 오른 후 가장 먼저 한 게 홈런을 45개나 쳐낸 페르난데스를 방출한 일이다. 페르난데스는 으시대고 한국 야구를 우습게 보고 나는 이런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못하냐는 식이었다. 그런 부분은 내가 가장 중시하는 팀워크를 해치는 독약과 같은 것이다. 스타플레이어가 없는 SK에 유일한 무기는 팀워크가 될 수밖에 없다."(조감독은 이 대목에서 가장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조범현식 용병술로 선수들은 야구를 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러가지 발생 가능한 상황을 철저히 준비할 것을 강조한다. 가능한 시나리오 몇 개를 직접 제시해주고 대응책은 스스로 짜 낼 것을 주문한다. 실수해도 절대로 당장 야단치지 않는다. 실수 후 제일 먼저 아는게 본인이다. 얼마나 무안하겠냐. 내 경험으로 볼 때 거기에다 야단치면 반발심이 생겨 역효과가 날 가능성이 크다."
―다른 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승엽은 머리가 영리해 한번 당했던 볼배합에 두번 다시 속는 법이 없다. 어디로 공이 들어와도 모두 홈런을 칠 수 있는 강타자다. 이렇게 대처 능력이 뛰어난 타자를 상대할 때는 치밀한 볼배합을 구상한다."
―상대 사령탑의 사인을 잘 읽어낸다는데.
"감독 성향이 강공 위주인지 모험을 즐기지 않는 스타일인지에 따라 대응 방식은 다르다. 전자의 경우에 작전 수행능력이 있는 주자가 루상에 나가면 작전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럼 3루 작전코치의 제스처에 집중한다. 경험이 많지 않은 코치는 작전이 있을 경우 사인동작이 빨라진다. 경험있는 코치도 평소보다 제스처가 느려진다거나 뭔가 변화가 있다. 현역 시절 상대 코치가 손목은 번트, 팔은 치고 달리기를 의미했는데 치고 달리기 사인을 알아내고 투수에게 피치아웃을 주문해 주자를 2루에서 아웃시키고 완전히 경기 분위기를 우리쪽으로 가져온 경험이 부지기수로 많다. 이렇게 상대 작전을 읽어내면 경기 흐름이 결정적으로 바뀐다."(구체적으로 더 말해달라는 요구에 영업비밀이라며 말을 아꼈다.)
―선수로서의 기억은.
"대부분 화려한 성적과는 거리가 멀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못하는 선수를 대하는 가슴이 스타출신 감독보다 뜨겁다. 내가 못 이룬 욕망을 선수에게 쏟아붓다보니 자연스럽게 열정이 솟아났고 코치로서는 최고가 되야 겠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살았다."
―야구에 입문한 계기는. 왜 포수를 하게 됐나.
"초등학교 때 발야구와 핸드볼을 잘 했는데 4학년때 체육선생님의 눈에 띄어 야구부에 들어갔다. 포수가 쓰는 마스크가 어린 마음에 멋있어 보여 줄곧 포수만 하게 됐다. 포수와 배터리코치만 하다보니 국내 타자들의 장단점을 훤히 알고 있다는 것이 이제 와서 큰 힘이 되고 있다."
―스트레스가 많을텐데.
"지방 원정경기 때 꼭 산에 한번씩은 오른다. 신선한 공기 마시고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면 머리 속이 맑아진다. 또 찜질방에 가서 아무 생각없이 늘어지게 서너시간 자면서 땀빼고 나면 정말 개운하다."
―앞으로 목표는.
"SK가 매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것이다. 프런트의 지원과 인천 팬들의 성원이 있는 만큼 SK를 한국프로야구 대표적인 명문구단으로 자리 잡도록 하고 싶다."
/글 박석원기자 spark@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 조범현 감독 프로필
―생년월일 : 1960년 10월1일생
―신체조건 : 177㎝, 78㎏
―혈액형 : A형
―출생지 : 경북 대구
―출신학교 : 대구 초등―대구대건중―충암고―인하대
―프로경력 : OB(82∼90년) 삼성(91∼92년 은퇴) 쌍방울(93∼99년 배터리코치) 삼성(2000∼2002년) SK(2003년 감독)
―프로 통산기록 : 615경기, 타율2할1리, 홈런12개, 107타점, 102득점, 15도루
―주요 성적·경력 : 1977년 봉황대기 우승, 한미 대학선발전 출전
―연봉 : 1억3,000만원(계약금 1억3,000만원·2년)
―가족관계 : 부인 성상희(45)씨와 2녀
―좋아하는 야구지도자 : 김성근 전 LG 감독, 김응용 삼성 감독
―취미 : 등산
김성근 전 LG 감독
조감독은 야구에 소질이 없었지만 야구를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노력형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커버하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고 상황에 따른 노하우를 축적한 게 지금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선수시절 기억에 남는 것은 충암고 3학년때 신일고와의 봉황대기 8강전서 결승타를 친게 유일하다. 성격은 꼼꼼하고 내성적인 편이다. 그러나 술한잔 들어가면 평소 하지 못하던 말도 많이 하고 활발해진다. 포수로서는 타자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상대팀 벤치의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탁월한 눈을 가졌다. 뭔가 하나가 왔을 때 어중간하게 넘어 가는 일은 없다. 끝장을 보고야 마는 집념이 있다.
선수 훈련도 애정을 가지고 정말 혹독하게 시킨다. 쌍방울코치시절 박경완을 너무나 가혹하게 연습시키곤 했다. 내가 봐도 선수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창조의식도 아주 강한 아이(?)다. 감독으로서 두달을 유심히 지켜봤다. 첫 달에는 미진한 부분이 이따금씩 보였지만 투수 기용 타이밍이나 팀 분위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등 하루하루 달라지는걸 느끼고 있다. 징크스를 많이 따지고 매사를 꼼꼼하게 챙기는 스타일이다. 앞으로 기대가 크다.
SK 와이번스 정태수 사장
조 감독은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이다. 옛날 운동부처럼 '하라면 해'가 아니고 과학적 야구와 자율야구, 스스로 하게 만드는 야구를 추구한다. 창단이후 첫 1위를 달리고 있는 환경에서 최근 디아즈의 부상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한 두 사람 빠져도 무너지지 않는게 진짜 조직력이다.
조범현 감독은 입에서 육두문자부터 나오는 과거형 지도자가 아니고 선수의 잠재력과 인격을 존중해준다. 선수들이 군대의 제식훈련처럼 하기 싫어하는게 기초 체력훈련이지만 이런 것들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능력이 뛰어나다. 조범현 야구는 선수들의 기를 살려주고 기를 불어넣는 야구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