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딱딱하게 느껴지는 법 문제를 시청자 눈높이에 맞춰 보여주는 TV 법정 프로그램을 공중파 3사가 하나씩 내보내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아직도 일부 드라마는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는 편실론을 은연 중에 내표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 사회 진실을 가릴 수 있는 최후의 잣대는 법 아닌가. 이미 외국에서는 '리걸(legal) 엔터테인먼트'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TV법정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얻고 있다.MBC '실화극장 죄와 벌'(월 밤 11시 4분)은 이미 흘러간 사건의 재판 과정을 치밀하게 분석해 법의 이면에 숨겨진 고민 등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다른 법정 프로그램을 압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방대한 사건 기록에 대한 꼼꼼한 검토, 재연드라마 형식을 통한 사실관계의 압축적 설명, 양 당사자의 균등한 발언기회 보장 등으로 법조계도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이태원 대학생 살인사건, 인기가수 김성재 살해사건, 김 모 순경 살인누명 사건 등 진실을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사건의 재연을 통해 부실한 초동수사와 강압수사 허술한 검시제도 등 우리 사법제도의 현주소를 일깨운다. 최근에는 사법사상 가장 방대한 사건기록을 남긴 것으로 얘기되는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을 발 빠르게 다뤄 눈길을 끌었다. 이때문에 심야시간대에 편성돼 있고, 스타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10% 안팎의 안정적 시청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욕심이 커진 탓일까. '실화극장'이 차츰 시청률에 영합하는 소재를 고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5월 12일에는 사위의 불륜을 의심한 장모가 명문 여대생을 청부 살해한 이른바 'H양 청부살인사건'을 다뤘다. 편집증 증세를 보이는 장모의 오해에서 비롯한 청부 살인, 판사 사위, 정략 결혼 등 선정적 요소를 듬뿍 담은 사건이었다. 청부 살해 1년전 H양이 장모를 상대로 제기한 접근금지가처분 사건의 재연이라는 '묘안'을 짜냈지만, H양 사건은 올 4월 주범이 검거돼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다. 이런 조급함은 자극적인 사건을 단순히 재연하는데 그쳤다.
5월 26일에는 화성연쇄 살인사건 중 유일하게 진범이 잡힌 '8차 사건'을 다뤘다. 영화 '살인의 추억' 관객이 벌써 400만명을 돌파했으니 정말 매력적인 소재다. 그러나 정곡을 찌르기에는 모자란 느낌이다.
최근 가수 김성재 살해 사건을 본 시청자가 게시판에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던 여성을 비방하는 글을 올렸다가 무더기로 고소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제작진의 책임과는 거리가 있지만, 실화를 다루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워야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사례다.
내가 만약 '실화극장' PD라면 법의 이면에 숨겨진 고민들, 법과 인간의 진실 사이에 높인 다양한 삶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초발심을 되새기겠다. 자칫 시청률에 연연하다가는 '실화극장'이 그동안 정통 TV 법정 프로그램으로서 쌓아온 성과를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
김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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