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냄새가 느껴지나?'영화 속 범인이 공중전화를 통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협박은 관객 모두의 귀에 대고 하는 소리 같다. 만약 범인이 지금 전화를 받고 있는 당신의 조금은 부도덕한 머리 속 사념, 탐욕, 허영을 귀신 같이 알고 있다면 그 공포는 훨씬 커질 터이다. 그런 사소한 흠이나 죄의식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일 텐데도 말이다. 영화는 얄밉게도 그 틈을 철저하게 파고 들면서 관객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
지난해 10월 발발한 워싱턴 연쇄 저격 사건으로 개봉이 무기한 연기됐던 '폰부스'. 별다른 폭력 장면이 없음에도 혈관을 조여 오는 듯한 긴박함, 연극 무대를 코 앞에서 보는 듯한 생생함이 돋보이는 이유는 전화박스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죽게 된다는 상황 설정의 힘이다.
'폴링 다운'에서 짜증나고 따분한 일상에 숨은 폭력성을 선명하게 부각시켰던 조엘 슈마허 감독은 이번엔 익명성 뒤에 숨은 폭력의 그림자를 형상화했다.
스투 세퍼드(콜린 파렐)는 교활함과 영리함, 교묘한 말솜씨가 돋보이는 뉴욕의 미디어 에이전트. 아내 몰래 애인에게 전화할 때마다 사용하는 53번가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간 게 첫번째 커다란 실수였다. 누군가의 장난 전화를 받고 피자를 가져온 배달원에게 짜증을 낸 건 두번째 치명적 실수였다.
애인에게 전화를 끊자마자 공중전화가 울린다. 의문의 전화는 스투의 사생활과 피자 배달원에 대한 불친절을 낱낱이 들먹이면서 아내에게 사죄전화를 할 것을 명한다. 전화를 끊으면 소음기가 달린 총으로 죽이겠다는 협박과 함께. 협박의 강도가 세지는 것과 동시에 마침 공중전화 박스 주위를 근거지로 삼고 있는 창녀들이 통화시간이 너무 길다며 난동을 부린다.
전화를 끊을 수 없는 스투의 상황을 창녀들은 알 리 없고, 이들과 승강이를 벌이는 스투에게 범인은 위협 사격을 가한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깊게 빠지는 공포의 수렁. 이따금 긴장이 풀릴 무렵이면 들리는 노리쇠 당기는 소리는 객석을 얼려버린다.
속물 스투 세퍼드 역의 콜린 파렐은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화면을 꽉 채우며 할리우드의 기대주로서 제 몫을 다했다. 건들거림, 황당, 후회, 절망, 공포, 분노 등 모든 감정을 반경 1m도 안 되는 전화 박스 안에서 차례로 표출하며 관객의 감정을 빨아들인다. 유머와 기지를 갖춘 경찰 반장 역 포레스트 휘태커와의 앙상블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러닝 타임과 영화 속 사건 경과 시간이 일치하는 만큼 현장 보도를 접하는 듯한 신선함은 있지만, 삶의 여러 단층을 꿰뚫고 들어가는 힘은 없어 보인다.
전형적인 상업영화적 설정에 문명비판적 메시지까지 슬쩍 얹어 넣으려는 잔꾀가 드러나는 대목도 마뜩찮다. 원제 'Phone Booth'. 13일 개봉. 12세 관람가.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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